양주 회암사지(사적), 왕실과 관련 있었던 조선 최대의 사찰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자락에 있는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이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양천도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회암사를 창건한 지공선사와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 그리고 무학대사가 회암사를 대표하는 승려이며, 절터 뒷편 오늘날 회암사가 있는 곳에 승탑이 남아 있다.

목은 이색이 쓴 ‘목은집’에 회암사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262칸의 건물에 거대한 불상 7구를 모시고, 3천여명의 승려들이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한다. 태조가 왕위를 물러난 후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 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사찰을 크게 넓혔으며, 명종때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크게 번창했었다고 한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 새로운 유학자들인 사림들이 조선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회암사를 폐사시킨것으로 보인다.

절터를 살펴보면, 양주 천보산(해발 423m) 자락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당히 부지가 넓다. 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세우는 방식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사찰의 가람 조성 방법과는 약간 다른데 고려시대 사찰 가람배치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현재 절터에는 많은 축대와 계단 등의 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궁궐 건축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가람의 배치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배치 형식인 불상을 모신 금당이 앞쪽에 있고 뒷쪽에 강당을 두고 있다. 태조가 머물기도 했으며 왕실인사들이 많이 방문해서 그런지 행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사찰에 많은 요사채 건물을 두고 손님들이 많이 머물 수 있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양주 회암사지(사적).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던 회암사는 조선중기 이후 사림세력들에 의해 폐사되어 건물터만 남아 있다. 전성기에는 262칸에 이르는 많은 불전과 요사채들이 있었으며, 궁궐 건축양식을 적용한 웅장한 사찰이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로 유추한 양주 회암사의 건물배치. 통일신라 평지사찰이나 산중에 자리잡았던 사찰들과는 다른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개경의 궁궐과 사찰의 건물배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회암사의 역사
회암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현존하는 가람보다 소략한 규모였며 현재 남아 있는 대규모의 가람은 이후 중창된 것이다. 회암사의 중창과 중흥의 배경에는 유명한 고승들과 왕실의 후원이 있었으니, 고려말에는 인도의 고승 지공이 회암사를 주목했고 그의 제자 나옹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에는 태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이 회암사의 주지로 재임하였으며, 이성계 본인도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회암사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런 까닭에 숭유억불이 조선의 건국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조선 최대의 사찰로 그 위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는 당시 회암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3천여명의 승려가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고 한다. 건물들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당당하였던 회암사의 위세는 문정왕후 사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창건 기록과 마찬가지로 폐사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관련문헌과 발굴결과로 추정해 보았을 때 1566년부터 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부터 시행된 발굴 성과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용봉 문양 막새, 청기와, 잡상 등이 출토되었으며,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광주 관요의 백자도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8단지의 화계나 정청은 궁궐 건축 양식과 유사하여 회암사가 조선초기 행궁으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처:양주시청>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 주불전인 보광전이 있던 건물터. 보광전은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금당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상당히 큰 불상을 모시고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보광전 서쪽편으로 천당과 서승당이 있었고, 동쪽편으로 요사채로 쓰인 건물터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보광전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축대를 쌓고 건물을 올렸는데, 궁궐 정전을 연상시키는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보광전 뒷편에는 강당 건물인 설법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사전과 영당이 있었고, 그 양쪽으로 고위 인사가 머물렀을 것으로 보이는 요사채인 수좌료와 서기료가 있었다. 특히 동쪽편 끝에 위치한 서기료는 상당히 큰 요사채 건물이었다. 설법전과 보광전 사이에는 작은 요사채 건물인 지장료와 향화료가 있었다. 전묘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는 문묘(성균관)를 연상시키는 건물배치이다.

SANYO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남아 있는 회암사지 부도

SANYO DIGITAL CAMERA안내표지판에는 주불전인 보광전 앞에 있는 건물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는데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이라 이색의 ‘목은집’에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터 모습으로 볼 때 상당히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 앞쪽에 남아 있는 많은 건물터. ‘목은집’에 표현된 내용과는 달리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지 입구. 당간지주 앞쪽으로도 축대를 쌓아 부지를 조성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궁궐 전각을 연상시키는 건물터의 축대와 계단.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지 입구에서 본 절터. 천보산을 배경으로 약간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평지사찰처럼 조성해 놓고 있다. 고려시대 궁궐과 사찰에서 보이는 건물배치 형태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지 절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388호)와 쌍사자석등(보물 389호)

SANYO DIGITAL CAMERA그 뒷편으로 무학대사탑비, 나옹선사 승탑과 석등이 나란히 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회암사지 절터 뒷편에 있는 나옹선사 탑비(보물 387호)가 세워져 있다. 최근 화재로 복제품이 그 자리에 있으며, 거북받침돌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몸은 경기도박물관에 보존.처리를 위해 보관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금탁, 태조3년(1394)에 만든 금탁으로 시주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보광전 터에서 출토되었다. 금탁에는 모두 134자의 명문이 남아 있는데, ‘왕사 요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로 시작하여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문의 조선국왕은 태조,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 세자는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에 희생된 방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기와들. 효령대군 명칭과 ‘정통병진’이라는 글씨와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어 왕실과 관계깊었던 사찰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순경진’ 글씨와 함께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 새겨진 기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명칭과 ‘정통병진’글씨가 새겨진 기와, ‘천순경진’이 새겨진 봉황무늬 기와와 용무늬 기와들이다. 용과 봉황무늬 기와가 함께 사용된 것은 회암사가 왕실 관련 사찰이었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회암사 절터에서 출토된 잡상. 잡상은 궁궐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것으로 왕을 상징하는 궁궐 전각에만 사용할 수 있다.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회암사의 높은 위상을 알 수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