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지에 쌍사자 석등(보물)이다. 이 석등은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 앞에 세워져 있다. 두마리 사자상이 있어 석등을 받치고 있는 통일신라 석등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사각형을 하고 있는 화사석은 팔각형을 하고 있는 기존 석등과는 형식면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고려말 이후 볼 수 있는 석등의 양식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팔각형 석등에 비해서 조각수법이나 전체적인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무학대사는 18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 불교를 배웠으며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에 만나 배웠으며,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였으며 태조와 함께 새도읍지로 한양을 정하는 큰 역할을 했다. 회암사 주지로 지내다가 금강산 금장암에서 입적하였다.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승려로 잘 알려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에 서 있는 쌍사자석등(보물). 조선초를 대표하는 석등 중 하나이다. 화사석이 팔각형인 기존 석등과는 달리 4각형을 하고 있다. 두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인데 입체감이나 생동감 등 측면에서 조각수법이 떨어지는 편이며, 전체적인 조형미도 좋은 편은 아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보물 389호,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懶翁)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SANYO DIGITAL CAMERA석등을 받치고 있는 쌍사자상. 아래,위 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고 있는데 섬세하거나 화려한 편은 아니다.

SANYO DIGITAL CAMERA4각형을 하고 있는 화사석은 2장의 돌을 받침돌 위에 올려 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팔각형 화사석에 비해 조형미가 떨어진다.

SANYO DIGITAL CAMERA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388호)과 쌍사자석등(389호)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