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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남한강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사찰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이다. 남한강 수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포나루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고달사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남한강변에 있던 여러 사찰 중 하나이다.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를 지냈으며 보제존자라는 시호를 받은 고승 나옹선사가 입적한 곳으로 그의 제자들과 후원자들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남한강변에 있던 쇠락한 여러 사찰들과는 달리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질 때 능을 지키는 원찰의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신륵사는 세종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직후인 성종대에 크게 중창되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을 중심으로 불전들이 배치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신륵사 가람은 주불전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요사채인 심검당과 적묵당,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앞쪽에는 신도들이 잠깐 쉴 수 있는 강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서쪽 뒷편 나옹선사 승탑 아래에는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로 조선왕실과 가까웠던 지공,나옹,무학대사 영정을 모신 조사당이 있고, 조사당 마당 서쪽편에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명부전과 관음전이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는 영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남한강변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절을 찾는 신도나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위한 요사채 건물이 많고 규모도 비교적 큰 편이다.

<여주 신륵사>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봉미산에 있는 사찰이다. 남한강 일대에 있는 여러 사찰 중 규모가 작은 편이었는데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를 지낸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크게 중창되었으며, 세종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직후인 성종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들어가는 길

<일주문>

지금도 여주 신륵사 일대는 여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남한강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1960년대 여주대교 건설되기전까지 조포나루는 이 지역에서 남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며, 조포나루가 있던 신륵사 입구는 많은 주막들이 들어서 있던 번잡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여주도자기 엑스포가 열렸던 도자기 축제장을 중심으로 관광단지가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신륵사 일주문을 들어서 입구의 번잡함은 없어지고 신륵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길은 남한강변을 내려다보면서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신륵사 들어가는 길>

관광지로 조성된 신륵사 입구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조성된 큰 길을 걸어 들어가면 된다. 남한강을 비롯하여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길이다.

<신륵사 앞 마당>

주불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강당, 조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관음전 등 최근에 조성된 불전들은 조사당 옆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에서 높지 않은 곳에서 위치하고 있지만,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범종각>

<강당인 구룡루(九龍樓)>

조선시대 관아 누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에서 설법을 강론하는 강당건물로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구룡루에 올라서면 남한강의 빼어난 경치와 조포나로를 오가는 배와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구룡루 옛 모습>

남한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는 건물의 특징으로 볼 때 사방이 개방된 누각 형태가 원래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룡루 앞에서 내려도 보이는 남한강>

남한강으로 오가는 황포돛배와 건너편 여주시 도심 풍경을 볼 수 있다.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

<중심 영역>

강당 건물이 구룡루를 돌아 들어가면 신륵사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으로 들어선다. 주불건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마당에는 다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찰마당에 향나무를 심는 것은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며, 공자묘나 서원 등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원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신륵사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 불전으로  숙종대에 지어진 것을 정조대에 중수하였다.

<다층석탑(보물)>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높이 3m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보물)이다. 통일신라 석탑이나 고려시대 경천사지 석탑 등에 비하면 아담해 보인다.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도교풍의 장식이 많은 경천사지 석탑의 특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앞 요사채인 심검당>

<심검당 뒷편 요사채>

<심검당 맞은편 적묵당>

한옥 살림집처럼 지어진 건물로 사찰 종무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신륵사를 찾은 신도들이나 손님이 묵는 건물이다. 신륵사가 남한강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절을 찾는 손님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앞 마당에서 본 구룡루>

‘봉미산구룡루’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에 올라서면 남한강을 오가는 배들과 나룻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극락보전 뒷편 조사당(보물)>

현재 신륵사에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앞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신륵사는 예종 때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정해지면서 전각들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사당 내부에 모셔진 영정>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나옹선사 석종(보물), 석종비(보물), 석등(보물)>

나옹선사(1320∼1376년)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회암사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말에서 조선초 불교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로 전국의 많은 사찰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승탑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원주 영전사에 세워졌으며, 여주 신륵사에는 그를 모신 조사당이 있다.

<명부전>

<관음전>

<조사당 뒷편에 있는 팔각원당형석조부도>

‘팔각원당형석조부도’라 불리며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승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을 이어받고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고 전체 높이는 225cm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리를 봉안한 사리함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을 의미한다. 이 부도는 팔각의 집모양을 받치는 3단형의 기단부와 팔각 집모양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과 일조로 구성된 팔각의 하대석에는 8개의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매우 낮은 원통형의 중대석은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상대석은 위로 향한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해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팔각형태로 문을 새기고 범자를 돋을새김하였다. 지붕을 나타내는 옥개석은 기와골 끝에 꽃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하면서도 세련되며 간결한 기풍을 풍기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탑의 형태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형부도라고 불리운다. 현재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탑인지 알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20cm이고, 공모양의 탑신은 60cm로, 당시 조성되었던 부도들과 비슷하다. 이 부도는 크게 위부터 상륜부와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그리고 원형 모양의 탑신이 하나의 돌, 그리고 기단부는 세개의 돌로 쌓았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일반적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되어 있다. 연꽃잎으로 장식된 상대석과 팔각의 돌 위에 각 모서리를 작은 원형의 연주문으로 장식한 중대석, 그리고 사각형의 지대석만 남아 있다. 상륜부는 연주문을 받침으로 한 세층의 보주형으로 장식했으며, 탑신 위의 옥기석 부분은 기와골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새기는 등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신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전탑과 정자가 있는 경치 좋은 곳

신륵사 경내 동쪽편 남한강가 넓은 바위에는 다층전탑과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은 신륵사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선박들에게 등대나 이정표같은 역할을 했던 탑이다. 다층전탑은 벽돌로 쌓아서 만든 전탑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시대에 중건하면서 옛모습고 벽돌로 쌓은 전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형태이고 많은 나람들이 오가는 남한강 나루터에서 눈에 띄는 이정표가 되었기때문에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탑 아래 바위 위에는 고려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라고 한다.

<다층전탑과 강월헌>

사찰 안쪽으로는 신륵사의 이정표가 되었던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과 남한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작은 정자인 강월헌이 있다.

<강월헌>

 남한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정자인 강월헌(江月軒). 원래 있던 정자는 홍수로 떠내려가고 197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신륵사 다층전탑>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으로 남한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신륵사가 있는 이 곳은 조포나루라고 불리며,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터로 불리며, 육상 수운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 신륵사 다층전탑은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나룻배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삼층석탑>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 바위에 세워진 삼층석탑. 고려말에 제작된 정형화된 삼층석탑이다. 석탑자체는 소박하지만 남한강변 바위에 세워져 남한강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신륵사 경내 동쪽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고려말 유학자이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쇄하고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우면서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대장각은 2층 건물로  다층전탑과 함께 남한강 일대에서 이정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신륵사 유래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출처: 신륵사>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