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숭릉(崇陵)이다.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이다. 숭릉은 산릉제례 공간인 정자각 양쪽에 통로 역할을 하는 익랑을 두고 있으며, 툇간 역할을 하는 배위청도 3칸이다. 이는 효종 영릉 천장과 숭릉 조성 시기가 겹치면서 국장을 간소하게 치르기 위해 임시빈전을 세우지 않고 정자각을 크게 지어 빈전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왕릉 석물도 효종 영릉을 이전하면서 묻어두었던 석물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현종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중단하고 훈련별대를 창설하는 등 군비증강에 힘썼다. 또한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종법을 실시하였고 동철활자를 주조하였다. 현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간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특히 장례절차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헌종의 능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태조의 능역인 동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임시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자각을 크게 짓고, 효종 영릉에 사용되었던 석물을 사용하는 등 간손하게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명성왕후 숭릉
제18대 현종(1641~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1642~1683)가 안장되어 있는 숭릉은 동구릉에서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 숭릉의 특이한 점은 숭릉 정자각에는 양쪽에 벽이 없는 익랑이라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이 중 숭릉 정자각 지붕은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숭릉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에 현종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이 내용은 숭릉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숭릉산릉도감의궤>에 남아 있는데, 숙종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석물을 새로 만들게 되면 백성의 노고가 가중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쓸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산릉제례을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보물 1742호). 이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다. 기존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숭릉을 조성하던 시기와 효종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는 시기가 겹치면서 임시 빈전을 짓지 않고 정자각을 임시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존 정자각보다 크게 만들었다.
봉분은 하나의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이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석물들은 동구릉에 있던 효종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묻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