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석기에서 신석기시대로, 2. 곡물재배, 3. 사냥과 고기잡이, 4. 토기와 신석기인 예술세계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농사가 시작되지는 않았고, 사냥과 어로 이외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채집하여 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사는 주로 중기 신석기 이후 조, 기장 등을 재배하였다. 간석기와 뼈로 만든 도구들은 효과적을 식량을 구하는 사용되었으며,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들은 실로 짠 이들은 실로 짠 옷감이나 동물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옥.동물뼈와 뿔. 조가비 등으로 몸을 꾸몄다. 또한 이들은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주변의 여러 집단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한반도에서 토기 사용은 기원전 8,000년 무렵에 만들어진 토기가 제주도 고산리에서 발견되어 그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기는 형태와 무늬 등이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토기는 6,000년경부터 사용한 덧무늬토기와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사용한 빗살무늬토기가 있다.
곡물재배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기본적으로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사냥하는 수렵채집 사회였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식량 획득 방법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곡물의 재배이다. 숲 또는 초원을 개간하여 씨앗을 심고 관리하는 농경의 등장으로 인간은 자연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식량 생산을 통한 잉여의 창출은 이후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이것을 ‘신석기 혁명’이라 부른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의 농경이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그리 크지 않아,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야 조, 기장 등 일부 곡물의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1. 조흔적 토기, 부산 동삼동, 2. 기장 흔적 토기, 창녕 비봉리
신석기시대에는 인류의 식량 획득 방법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바로 곡물의 재배, 즉 토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심고 관리하는 농경의 등장이다. 농경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산 방식으로 이후 사회문화적 발전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는 곡물재배가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야 조, 기장 등 일부 식물의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반도의 식생이 낙엽활엽수림으로 변화됨에 따라 도토리처럼 새로운 식량자원이 번성하게 되었다. 낙엽활엽수를 대표하는 참나무는 참나무과 참나무속에 속하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 여러 수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도토리는 2년에 한번씩 열리며 나머지는 매년 도토리가 열린다. 이 중 졸참나무의 도토리는 떫은맛이 나지 않아 날것으로 먹을 수 있지만, 그밖의 도토리는 타닌(tannin)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떫은맛을 뺀 다음 녹말을 얻은 후 이것을 가공하여 먹는다. <출처: 중앙박물관>
결합식 돌낫, 시리아, 돌낫, 1. 강릉 초당동, 2. 서울 암사동
뒤지개, 1. 서울 암사동, 2. 용인 농서리, 3, 종성 상삼봉
갈돌, 1. 연천 학곡리, 2. 인천 중산동, 3. 서귀포 강정동, 4.제주 도련동
점토덩어리, 강릉 초당동, 점토띠, 1. 강릉 초당동, 2. 부산 동삼동, 3. 통영 욕지도, 4. 강릉 지변동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빚는 방법으로는 손빚기법과 테쌓기법, 서리기법 등이 있다. 토기를 빚을 때는 받침대로 고래 척추뼈나 넓적한 돌, 원반형 토제품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 토기 받침대와 토기 바닥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받침대 위에 넓적한 나뭇잎을 깔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토기 바닥면에 나뭇잎 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토기 받침대, 1. 서울 암사동, 2,. 울진 죽변리,
토기의 모양을 만들고 나면 일정한 질감과 색을 내기 위해 입자가 고운 진흙물에 담그거나 붓으로 얇은 막을 입히기도 한다. 울진 죽변리 유적, 통영 연대도 유적 등에서는 주칠로 일정한 문양을 장식한 토기들이 발견되었고,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는 안료의 원석도 발견되었다. 토기에 표현된 무늬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다양한 무늬를 그리고 새기고 덧붙여 넣었다는 점에서 신석기인들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식기 바리, 접시, 1. 경성 원수대, 2. 청진 농포동,
최초의 토기는음식을 조리하는데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날로 먹거나 불에 직접 구워야만 먹을 수 있던 음식들이 삶거나 쪄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조리용 토기 표면에는 음식을 조리할 때 끓어 넘쳐 생긴 탄화물 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토기 안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발견되기도 한다. 토기의 또 다른 용도는 식량의 저정이다. 가공된 다양한 먹거리는 토기의 등장으로 이전보다 더욱 손쉽게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신석기시대 말기 동북지방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소형 토기들이 나타나는데, 이 토기들은 일종의 개인 식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