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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국보), 삼국시대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첨성대(국보)이다. 현존하는 천문대 중에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석조건축물 중에서도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잘다듬을 돌을 원통형으로 27단을 쌓고 그 위에 정(井)자 형태의 상층부를 올려 놓고 있다. 전체 높이 9.4 m로 남쪽에 정사각형 출입문을 두었고, 사다리를 타고 정상부에 올라 천문을 관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부에는 반원형 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위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거나 육안으로 별을 관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첨성대(국보)>

첨성대는 신라 천년 왕성이었던 경주 월성 북쪽편에 남아 있다. 삼국이 한강유역을 쟁탈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후 통일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세워졌다. 월성 북쪽은 원래 내물왕대 이후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조성되던 지역으로 신라가 국가의 규모를 갖추면서 궁궐 전각들이 들어섰던 곳이다.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 생략 ~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선덕왕 지기삼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정면에서 본 모습>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우물정(井)모양의 정상부을 얹은 모양이다. 상층부외 기단을 제외한 원통형 몸통은 27단으로 361개의 돌로 쌓았는데, 1년을 의미한다고 하나 날짜가 정확하지 않으며, 기록으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남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비어 있다. 내부에도 19~20단, 25~26단에 길다란 석재를 연결하여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놓고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원통형 몸체 외부는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으나 내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첨성대 지대석과 기단>

<첨성대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첨성대에 들어가는 정사각형 출입문이 원통형 몸체 남쪽에 달려 있다. 첨성대 내부는 출입문 아래로는 막돌과 흙으로 차 있으며, 내부에서 사다리를 타고 정상부로 올라가 천문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장대석으로 정(井)형태로 만든 정상부>

정상부에는 반원형 판석이 막혀 있고, 나머지는 판자를 올려놓아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관천대와 전체적으로 구성이 비슷하여 정상부에 간의(簡儀)와 같은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인된 바는 아니다. 장대석이 걸쳐 있는 19~20단과 25~26단에 튀어나온 돌이 보인다.

 <뒷쪽에서 본 첨성대>

첨성대에서 별을 관측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제사시설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고구려 평양에도 첨성대가 있었고,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도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에서 만든 별자리지도를 참조하여 조선시대에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천문지식 수준이 꽤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첨성대가 천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첨성대는 오늘날 신라의 수도 경주에만 남아 있지만, 실제로 삼국 모두 첨성대를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첨성대는 평양에 남아 있었따는 기록이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는 문헌상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천문역법을 중국.일본과 교류했던 일본에도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첨성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하였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록에는 없지만 개성 만월대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되는 석조물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는 천문을 관측하는 관청이 관상감과 왕실에서 운영했던 관천대가 창경궁과 종로구 가회동 현대 사옥 앞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국왕이 직접 천문을 관측하던 창경궁 관천대(보물)>

내부에서 사다리를 타고 정상부에 오르는 첨성대와는 달리 계단을 사용한다. 정상부 소간의 등을 비롯한 천문관측기구를 올려 놓고 천문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천문관측을 담당했던 관청인 관삼감에 설치되었던 관상감 관천대>

<조선시대 별자리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만든 천문각석도를 기록한 천문도를 참조하여, 당시의 별자리를 세밀하게 검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천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해질무렵 석양을 배경으로 한 첨성대>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으로 고대 이래로 국가나 집단을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의 움직임이나 특별한 현상을 관측하는 것과 시간과 날짜를 정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함이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매일 한번씩 회전하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시간과 방위를 측정하는 것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의 움직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혜성,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별, 태양의 흑점 변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하늘에 별이 사라지는 항성의 폭발 등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꾸준히 관측하여 하늘의 움직임을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첨성대 야경>.

<첨성대가 위치한 경주 월성 북쪽 옛 궁궐이 있던 곳>

동쪽편으로는 내물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들이 자리잡고 있고, 첨성대 부근에는 궁궐 건물터들이 남아 있다.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계림 야경>

경주 첨성대, 국보, 경주시 인왕동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井)자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어 있다. 정남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 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면이 지름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m이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4. 위키백과, 2016년
  5.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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