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여러 궁궐들을 중건하면서 세워진 궁궐로 1623년(광해군15)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에 소실된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고 창덕궁을 법궁(法宮)으로 삼으면서 이궁(離宮)으로 동궐의 부족한 공간을 해소하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숙종과 경종이 경희궁에서 태어났으며, 숙종.영조.순조 등이 승하하였고,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고종대 경복궁을 중거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각들을 헐어내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교육하기 위한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198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경희궁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전시는 조선후기 이궁(離宮)으로 여러 국왕과 왕실이 머물렀던 경희궁의 역사, 궁궐 전각의 공간배치,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 등을 거치면서 전각들이 없어지고 터만 남게 되었던 과정,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경희궁의 옛 흔적들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2015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된 “경희궁은 살아있다.” 특별전.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조선후기 서궐이라 불렸던 경희궁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는 내용의 전시였다.
조선이 새로운 궁궐, 경희궁
태조는 도성 건설과 함께 법궁(法宮)으로 경복궁을 건립하고 태종은 이궁(離宮)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건설했다. 이처럼 한양의 궁궐은 법궁-이궁 체제를 토대로 했다. 이러한 구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기존의 궁궐이 완전히 소실됨으로써 전면에 걸친 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을 완료하자 인왕산 근처에 인경궁과 경덕궁 2개의 궁궐을 건설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경덕궁에서 살아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경덕궁은 현종대까지 그저 창덕궁의 수리기간에 잠시 기거하는 궐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궁궐 경영을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이용한 숙종은 경덕궁을 양궐체제의 한축으로 확실하게 위상을 잡아 나갔고, 영조는 치제의 절반을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궁명을 ‘경희궁’으로 바꿨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광해가 왕암(王巖)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궁을 세웠다. 인조대왕이 반정하였고, 계사년 이후 이 궁에 임어하였다. 숙종 무자년 49(1708년)에 서암(瑞巖)이라고 고치고 어필로 ‘瑞巖’ 두글자와 그 이유, 시기를 사방석에 새기었다. – 『영조실록』 영조49년(1773) 11월 12일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복원모형, 1/300, 서궐도안(1829년 이전 추정)과 경희궁지 종합정비계획(종로구, 2013년)에서 제시된 배치되 궁역(宮域)을 기본으로 하여 일부 수정제작.
경희궁 정문 흥화문에서 본 경희궁 모형. 법궁인 경복궁과는 달리 이궁(離宮)으로 세워진 경희궁은 정무를 보는 궁궐이라기 보다는 왕실가족이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서울고등학교 모형, 1/300, 1993년 서울고등학교. 일제는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인 세웠으며 1970년대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경희궁지 모형, 1/300, 2015년 현재 경희궁지와 서울역사박물관 주변의 현황을 모형으로 제작.1980년대 이후 경희궁 옛터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일부 전각들만 복원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경덕궁의 건설과 양궐체제의 형성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도성의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종묘의 복구가 제일 먼저 시행되었고 연이어 창덕궁, 창경궁이 중건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에 기거하기를 극도로 꺼리고 1616년 새로운 궁궐 짓기에 몰두하여 인왕산 아래 인경궁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경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새문동(塞門洞)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있으니 새 궁궐을 짓자는 술사(術士)의 말에 따라 광해군은 경덕궁 건설을 단행하여 1620년 궁이 탄생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잠저였으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인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불탄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기 위해 재목을 헐어다 사용하게 되고 궁궐의 모습과 위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고 경덕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체제가 성립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760년에 바뀐 경희궁의 명칭이 아직 경덕궁으로 남아 있다. 이전의 지도를 참고하여 그리는 과정에서 옛 지명을 고치지 못한 채 그대로 옮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에서 원종의 옛 저택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편액으로 좌측에 ‘임신년 초가을 26일에 삼가 쓰다.’라 되어 있어 영조 28년(1752)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전국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京都」 부분에는 경희궁이 건설되기 이전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공조」에 실린 경희궁 내용에는 궁이 적선방에 있으며, 광해군이 인경궁, 경희궁, 자수궁을 건설하였고, 경희궁 터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저택이 있던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로 숙종 때 처음 간행하여 역대 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중교.보간한 것을 고종 34년에 합간한 것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인경궁 흠명전에서 승하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창덕궁은 그 서쪽에 있고, 창경궁은 그 동쪽에 있네. 한 궐 안에 두 궐이 있으니, 그것을 세운 것은 국초였네. 한양에 도읍하여 이 궐을 먼저 지었고, 경희궁은 계혜년에 지었네. 경희궁에는 광명전이 있고, 창덕궁에는 창경궁이 있다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영조어필(英祖御筆), 1770년. 서울 망우동으로 이주한 동래 정씨 가문의 정흥겸에게 영조가 하사한 어필이다. 이 어필에는 영조의 힘찬 필체와 국왕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창덕궁에는 금까마귀 빛나고, 경희궁에는 옥토끼가 밝도다. (昌德金烏光, 慶熙玉兎明)
왕의 임어와 궁궐경영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 동안 경덕궁에 머물렀다. 효종과 현종의 경우 창덕궁과 창경궁 재건 이후 잠시 동안만 임어(臨御)했을 뿐 경덕궁은 궁으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과 서인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있어 경덕궁 이어(移御)를 적극 활용하였다. ‘경덕궁’이 원종의 시호 ‘경덕’과 동음이라고 하여 1760년 ‘경희궁’으로 궁명을 변경한 영조는 19년 동안이나 경희궁에 머물렀으며,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승하할 때까지 거의 이곳에서 지냈다. 경희궁 숭정전에서 즉위한 정조는 자객의 위협을 받자 이곳에 더는 임어하지 않았지만 『경희궁지』를 비롯해 경희궁과 관련된 시와 문헌을 많이 남겼다. 경희궁은 1829년 대화재 이후 재건되었고, 철종이 약 7개월 머문 후로 더 이상 임어한 왕은 없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8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회상전, 흥정당 등 내전이 크게 소실되었다. 이 책은 1830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진행된 경희궁의 중건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흥정당, 집경당, 융복전 등 5개 전각의 도설이 실려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는 공주로 피신한 후 경덕궁을 거처로 삼았다. ‘상이 대비를 모시고 공주에서 돌아왔다. (중략) 이때 대가가 출발, 서울에 이르러 숭례문으로 들어오자 성안의 백성이 모두 나와 길 양옆에 모여서서 구경하였다. 상은 곧바로 종묘로 가 신주를 봉안한 후 위안제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돌아와 이번 전쟁에서 죽은 고덕상 등에게 증직을 하도록 명하였다.” – 인조2년(1624)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625년 4월 17일 인조가 개국공신부터 정사공신, 진무공신에 이르는 17인의 공신 및 그 자손을 거느리고 회맹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회맹제는 경복궁 신무문 밖에 회맹단을 쌓고 거행하였아. 이후 궁궐(경덕궁)로 돌아와 회맹연을 가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680년(숙종 6) 4월의 기록으로 경신환국과 관련한 자료이다.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하던 심유가 보관한 것으로 보이며, 공무상 작성했던 4월2일부터 29일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숙종은 경신환국을 시행하면서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덕궁으로 이어하여 정국변화를 꾀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승하한 유일한 왕이다. ‘휘는 순(淳)이요 자는 명보(明普)이다. 1661년 8월 15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탄강하고, 46년간 재위했으며, 1720년 6월 8일에 향년 60세로 승하하였다. 명릉에서 장례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760년(영조 36)에 경덕궁(慶德宮)의 이름을 장릉(章陵,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이라 고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03년, ‘경덕’의 명칭이 원종의 시호인 ‘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의 ‘경덕(敬德)’과 동음이라하여 경희궁으로 개칭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8. 동여도(東輿圖, 복제), 19세기 후반, 『동여도』 중 「도성도」부분이다.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1829년 10월 3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 경희궁의 나인이 드나드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주요 내전 전각이 전소하였으며, 고종 때에도(1889년) 숭정문과 동서 행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0.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1693년,
1693년 경덕궁 수리의 제반 공역을 기록한 유일본 의궤이다. 궁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보다는 훼손된 전각을 수리할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대전과 광명전 일대의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부재 수리, 단청, 현판, 창호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1.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93년,
1667년 11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왕대비 인선왕후가 거처할 대비전으로 지은 창덕궁 집상전의 영건에 관해 기록한 유일본 의궤이다. 집상전은 경희궁의 집희당을 옮겨지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 대궐과 이진
경희궁은 ‘야주개(夜珠峴)대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경희궁 주변의 얕은 고개 이름에서 비롯됐다. 야주개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어서 밤에도 붉게 빛나 그 광채가 이 고개까지 미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한경지략』에서는 현감 이신(李伸)의 글씨라고 밝히고 있다. 이신의 글씨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북한산 구천계곡에 있는 ‘九天銀瀑’ 각자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대문과 경희궁
경희궁과 바로 인접해 있는 서대문은 궁궐 경호상의 이유로 1706년부터 왕이 이곳에 임어할 때마다 문을 폐쇄했고, 이 조치는 1744년 영조가 중지시키기 전까지 지속됐다. 서대문의 폐쇄는 소의문의 통행을 활발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궁과 인접한 서대문로(현재의 새문안로)의 위상은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1890년대의 한 사진을 보면 성벽과 궁장(宮牆)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내려오다가 경희궁의 숭의문을 지나 갈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구한말 서대문 일대의 모습을 찍은 사진. 경희궁 바깥쪽에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 지금도 이곳에 작은 규모의 주택가가 남아 있다.
경희궁 사람들
인조에서부터 철종까지 10명에 이르는 왕이 경희궁에 임어하였고, 영조는 그 가운데 경희궁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특히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건설된 경희궁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은 숙종이었으며 그는 경희궁에서 13년을 임어하였고,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에서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왕을 비롯한 왕비, 후궁, 세자 등 왕실가족들의 일상 공간이었다. 경희궁 동궁전의 첫 주인인 소현세자, 인현왕후,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 혜경궁 홍씨 등이 경희궁에 살았던 대표적인 왕족들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영조 어진. 경희궁은 숙종이 태어난 곳으로 영조는 숙종의 대를 잇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경희궁에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인 이후에는 경희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태령전에 모셔졌던 영조의 연잉군 시절 모습을 그린 어진.
1. 선희궁와궁방전문서(宣禧宮外宮房田文書)’, 조선후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선희궁, 정조의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의 사당인 경수궁(慶壽弓),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의 의빈방(宜嬪房)에 관한 전문서(田文書)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1899년, 경희궁에서 임어한 왕은 인조부터 순조까지 총10명으로 이중에서 영조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3. 어제만천명월주인옹자서(御製萬川明月主人翁自序), 1798년,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을 호로 삼고 그 내력을 적은 글이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정빈 이씨이고 사도세자의 형이다.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0세 어린 나이에 죽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가 양자로 입적하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영릉이며, 시효는 효장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훈유시(訓諭詩), 1743년, 1743년 관례를 치르는 사도세자에게 영조가 훈유한 당부의 글이다.
6. 숙종어필(肅宗御筆), 조선후기, 숙종이 숙명공주(효종의 둘째공주)에게 내린 오언시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숙명공주의 질병이 낫기를 바라며 지은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양정재는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생가로 육상궁 동측 담장에 있었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집은 여경방에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경희궁에서 이곳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적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8 영묘어필첩(英墓御筆帖), 1764년, 영조의 어필첩인데 바위 그림이 실려 있다.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