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경희궁의 공간 구성

경희궁은 임진왜란 창덕궁이 공식적인 궁궐인 법궁(法宮)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으로 자리잡으면서 서궐(西闕)로 불렸다. 법궁으로 세워진 경복궁과는 달리 경희궁은 인왕산 자락 아래 경사진 지형에 맞추어 전각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였다. 정전인 숭전전이 인왕산 자락 아래 서쪽편에 치우쳐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종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궐내각사와 동궁전 흥화문 주변에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국왕과 가족들이 거처하는 편전과 내전들이 들어서 있었다. 숭정전 서쪽 인왕산 자락에는 국왕이 도심 풍경을 감상하면서 쉴 수 있도록 영취정과 춘화정 같은 정자들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법궁과는 달리 정전위주의 공간배치가 아닌 왕실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궐내각사의 규모 또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궁궐 규모는 동궐보다 작지만,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지대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도성 안팎의 경치를 조망하기에 좋은 장점이 있었다. 특히, 숙종과 영조, 정조는 서궐에 머물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은 국왕이 임시로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세워졌기때문에 주변지형이나 환경에 적절히 맞추어 전각들을 배치하였다. 법궁과는 달리 국왕 일상적으로 머무는 편전과 내전, 왕실가족이 거처하는 전각 위주로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정전인 숭정전이 서쪽편에 치우쳐 있다.

경희궁의 공간과 생활
경희궁은 대지의 형세를 반영한 특이한 형태의 궁이다. 광해군이 빠른 공사 진행을 위해 대지의 경계를 먼저 긋고 시작한 탓에 땅의 모양이 동서로 길며, 건물도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서궐도안에 나타난 전각과 문은 약 190여개가 되며, 정문인 흥화문은 남향이 아니라 종로와 마주하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특히 『한경지략』에서는 경희궁이 창덕궁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땅이 높아 시원한 것은 훨씬 뛰어나다고 적고 있는데 실제로 전망이 뛰어난 영취정에서는 관악산까지 보였다. 영조는 추운 겨울에도 매일 이곳에 올라 멀리 보이는 사당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밤이 늦도록 존현각에서 일기를 썼고, 이는 『일성록』의 기초가 됐다. 이곳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세손 정조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궐도안(西闕圖案), 보물 1534년, 1829년 이전 추정, 고려대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궐도안 중 정전인 숭전전과 내전이 있는 영역.

1829년 이전으로 추정하며, 기록이나 낙관이 없어서 화가와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경희궁의 건축과 주변의 자연경관을 한눈에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으로,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인 화폭에 먹만을 사용해서 표현한 밑그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중 숭정전지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1744년, 중앙박물관. 영조가 51세 되는 해인 1744년 9월 기로소에 들어간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은 영조가 51세가 되던 해인 1744년(영조 20년)에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왕이 친히 기로신에게 베푼 연회 장면과 행사에 참석한 기로신의 초상이 수록된 화첩이다. 어필과 죽시, 어제시, 갱진시와 행사도 5점을 포함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현당어제어필화재첩(景賢堂御製御筆畵帖), 1741년.

이 화첩은 영조가 경현당에서 승정원 승지 및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치하한 선온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제1면에는 그림, 2~6면에는 경연에서 왕이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치하하는 글, 7면에는 어제시, 8~10면에는 갱진한 시가 실려 있다. 1면의 그림은 경현당을 에워싼 행랑 남쪽에 숭현문, 서쪽에 청화문이 표시되어 있고, 월대 남쪽에는 연꽃이 핀 사각 모양 연못을 배치하였다. 경현당 안 두 기둥 옆에 향좌아(香座兒)가 있고 북쪽에 있는 일월오봉병.서안(書案) 등으로 영조의 자리임을 알 수 있으며, 동쪽은 왕세자의 자리이다. 남쪽에는 13명의 관원들이 2줄로 앉아 있는데, 각 인물 앞에 음식을 차린 흑칠원반이 놓여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숙종신미친정계병(肅宗辛未親政契屛, 복제), 1691년.

실제 행사 장면과 이상화된 산수화를 결합시킨 17세기 계병으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친정도 계병이다. 이 그림은 경희궁 흥정당에서 행한 도목정사(인사행정)와 이어지는 선온(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의 모습을 담은 8첩의 병풍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병술진연도병(英祖丙戌進宴圖屛), 1766년,

1766년(영조 42년) 왕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경희궁 숭정전에서 거행된 궁중연회를 그린 것이다. 1766년은 숙종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하는 진연이 치러졌던 1706년과 같은 병술년이다. 당시 13살이던 영조는 연잉군 자격으로 시연(侍宴)했는데, 영조는 자신이 참여했던 이 진연을 60년 만에 같은 날짜와 장소에서 계술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공간구성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흥화문, 숭의문 등 다섯개다. 정문인 흥화문은 궁의 동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흥화문과 금천교를 지나 어도(御道)의 서쪽 끝에 이르면 남향을 하고 있는 숭정전에 다다른다. 궁의 안쪽 깊숙이 있는 숭정전 뒤편으로는 자정전이 있고, 자정전 북서쪽에 영조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태령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자정전에서 태령전에 이르는 후면에는 경희궁 건설의 배경이 되었던 서암이 기묘한 모양새로 버티고 있다. 정사를 보는 흥정당 일대와 침전인 회상전 일대는 궁궐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동궁전인 경현당은 흥화문 가까이에 있다.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과 연회 장소인 광명전은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 가장 높은 지대에는 영취정과 춘화정이 있어 경희궁을 조망할 수 있다. 남쪽 어도 건너편으로는 궐내각사들이 위치여, 내전의 궁중 생활을 지원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인 흥화문에서 본 경희궁(모형). 정문이 종로가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흥화문에서 숭정전에 이르는 통로 오른쪽에 편전과 내전이, 왼쪽에 궐내각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시기별 전각의 변화
광해군 대에 지어진 경희궁은 순조년간의 대화재 이전까지는 큰 변화없이 그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효종 대에 창덕궁의 만수전을 짓기 위해 일부 전각들을 철거하여 이전했고, 현종 대에도 창덕궁의 집상전을 고치기 위해 경희궁 집희당을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숙종대에 이르면서 경희궁의 수리가 대규모로 이뤄졌다. 새로 건축된 전각이 많지는 않았지만 단청과 현판 등의 개보수가 대부분의 전각에 걸쳐 이뤄짐으로써 왕의 안정된 생활공간으로 안착했다. 영조 역시 우문각, 경봉각 등 주요 전각을 건축하면서 궁궐의 위상을 확보해 나갔다. 1829년 순조 때의 대화재로 회상전을 비롯한 내전 일곽이 큰 피해를 입었ㄷ으나 복구 작업은 이듬해에 곧바로 이뤄졌다. 이후 철종부터 고종대까지 약간의 전각 수리가 있었으나 큰 규모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왕의 임어 기간도 1년 남짓으로 매우 짧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궐영건도감의궤』에 나타난 수리 전각, 1830년, 『경덕궁수리의궤』에 나타난 보수 전각, 1693년

OLYMPUS DIGITAL CAMERA경희중 전각 중 규정각, 집희당, 송단, 경봉각, 개양문의 위치

OLYMPUS DIGITAL CAMERA1. 궁궐지(宮闕志), 고궁박물관,

현종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편자 미상이며, 제5책이 경희궁지(慶熙宮誌)이다. 내용은 위치, 시건(始建), 재해, 중수, 고사(故事), 기상(氣象), 상량문, 이어(移御)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경희궁지』’대내(大內)의 정침(正寢)이 융복전(隆福殿)이고, 융복전의 서쪽으로 회상전(會祥殿)이 있으니, 이는 수시로 임어하는 내전(內殿)이다. 그 동쪽에는 회장각(會葬閣)이 있고, 서쪽에는 무일합(無逸閤)이 있으니, 모두 별실이다. 그 밑에는 못이 있는데 못의 호칭은 벽파담(碧波潭)이고, 벽파담 가에는 한칸의 죽정(竹亭)이 있다. ‘ 「춘저록」잡저(雜著)

OLYMPUS DIGITAL CAMERA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 조선조 궁실편에는 경희궁의 위치와 각 전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지고」 26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19세기, 조선시대의 국가 및 서울의 지리.제도.인문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경희궁의 현황이 실려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한경지략(漢京識略), 1830년,

서울 도성을 중심으로 성곽, 궁궐, 산천, 고적 등의 형승과 연혁을 기록한 책이며, 경희궁의 위치, 전각 내용, 궐내각사에 대한 설명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송단,

‘단壇’이란 높고 밝은 데 위치한 군자가 놀고 쉬는 곳을 말한다. 금원(禁苑)에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더니 내려다 보면 못이 있고, 누대가 있고,숲이 우거져 있어 좋고, 올라가서 보면 술도 마실만하고, 시도 읇조릴 만하고 마람도 쐴만하고, 거문고를 뜯으며 즐길만하며, 또 활쏘기도 껴를만하다. (중략) 내가 그 단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곳이 꼬 구름 그림자가 땅을 덮고 있고, 공중에서 파도소리가 나서만은 아니다. 그 때문이 이 기(記)를 쓴 것이다. ‘ – 「기記」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 국조보감(國朝寶鑑), 1884년, 집회당, 현종은 경덕궁의 집회당을 옮겨 창덕궁의 집상전을 건립하였다.

‘경덕궁 곁에다 집상전(集祥殿)을 건립하도록 명했다. 그때 상이 자의, 인선 두대비를 모시면서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자의대비가 거처하는 만수전 동편에다 따로 전각 하나를 건립하고 이름을 집상이라 하여 그곳을 인선대비 거소로 삼았으니, 마치 한나라때의 장락궁(長樂宮)과 장신궁(長信宮) 같은 제도를 본 뜬 것이다’. -현종 8년(1667)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국조보감(國朝寶鑑), 1884년, 규정각,

‘혼천의를 수리하였다.(중략) 이때 이러러 상이 숙종조에여벌로 주조한 혼천의의 형상이 세월이 오래됨에 조금 변하였다고하여 안중태 등에게 명하여 중수하도록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 흥정당의 동쪽에 지어 봉안하였다.’ – 영조8년(1732)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 개양문 하마석,

’1789년에 조신들의 하마석(下馬石, 말에 오르내릴때 발돋움을 위한 노둣돌)을 궐문밖에 세웠다. 금호문 밖 10보 좌우,단봉문 밖 8보 서쪽, 요금문 밖 7보 석교 건너편, 선인문 밖 7보 좌우, 통화문 밖 7보 좌우, 경희궁 개양문 밖 8보 좌우, 그리고 흥원문 밖 7보 남쪽 가에 하마석을 배치하였다. ‘ – 「예고」24, 조의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숭정전갑자진연도병(崇政殿甲子進宴圖屛), 1744년,

1744년(영조 20)은 망육순(望六旬) 즉 51세 되는 해이며, 즉위 20주년을 맞는 갑자년이었다. 이에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입기로소(入耆老所)의식이 끝난 한달 후인 10월 7일에 숭정전에서 별도로 진연이 치러졌다. 이보다 3일 앞선 10월 4일에는 광명전에서 대왕대비전과 궁중전에도 진연을 실행했다. 1폭에서 3폭까지 숭정전 진연 장면이 그려져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을유기로연(英祖乙酉耆老宴).경현당수작연도병(景賢堂受爵宴圖屛) , 보물 1531호,1765년. 1765년에 10월 11일 경현당에서 거행된 수작례(受爵禮)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영조을유기로연(英祖乙酉耆老宴).경현당수작연도병(景賢堂受爵宴圖屛) , 보물 1531호,1765년. 1765년 8월28일 기로소를 방문하여 잔치를 하는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영조가 을유년인 1765년(영조 41) 8월 기로소를 방문하여 잔치를 하는 모습과 그해 11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영조의 망팔순 기념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궁중생활
1620년 궁이 완공된 이래, 경희궁에서 치러진 첫번째 행사는 1625년 경현당에서 행해진 소현세자의 관례였다. 그리고 경희궁에서의 마지막 행사로 기록된 것은 1844년 숭정전에서 치러진 헌종의 가례이다. 그 사이 약 200여 년의 세월동안 이곳에서 경종과 정조가 즉위하였고, 숙종과 헌종이 가례를 치렀으며, 영조와 순조 등이 승하했다. 정조가 1776년에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곳이 이곳 숭정전이고, 세손시절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책 한권을 읽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었가도 술회한 곳이 바로 동궁의 경현당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함께한 경희궁에 남다른 애착이 있던 정조는 『경희궁지』를 통해 궁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영조 또한 노년을 경희궁에서 지내면서 궁에 대한 감회와 기억을 여러 글과 현판 등을 통해 남겼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중 숭정문, 태령전, 영소전, 집경당, 융복전, 경현당, 어조당의 위치

OLYMPUS DIGITAL CAMERA1. 영조국장도감도청의궤(英祖國葬都監都廳儀軌), 1776년(정조 즉위) 영조의 국장에 관한 기록이다.
영조는 1776년 3월5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영조국장도감도청의궤(英祖國葬都監都廳儀軌), 1776년(정조 즉위)

OLYMPUS DIGITAL CAMERA2.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숭정문, 정조는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나에게 효장세자의 후사가 될 것을 명하셨지만, 전에 선대왕께 올린 상소를 보면 근본을 둘로 할 수 없다는 나의 뜻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  -「윤음」-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 영소전

‘영소전(永昭殿)은 경덕궁 안에 있다. 인경왕후의 혼전이다. 1722년 효령전을 태묘에 부할때 영소전으로부터 함꼐 부하였다. ‘ -「재계고」-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영종대왕어필(英宗大王御筆), 1730년, 어조당,

1730년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가 경희궁 어조당에서 승하했을때 복제(服制)와 관련하여 영조가 내린 전교이다. 1720년 숙종 승하 시 상복제도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익선관(翼善冠)과 포모(布帽)에 대한 별다른 규정을 마련하지 않아 국휼(國恤)을 당하여 상복을 입을때 임금과 신하가 쓰는 관(冠)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익선관과 포모의 구별 규정에 대하여 논의한 후 포가(布角)으로 차이를 두도록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어제문효세자효장묘신도비(御題文孝世子孝昌墓神道碑), 18세기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며, 2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5세에 홍역으로 죽었다. 승하한 후 경희궁 태령전에서 전작례(왕이난 왕비가 못되고 죽은 조상이나 왕자, 왕녀의 제사를 임금이 몸소 지내는 것)가 시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전각 중 숭정전, 덕유당, 집경당, 회상전, 광명전, 봉상루, 육당, 시강원

OLYMPUS DIGITAL CAMERA1. 어제창덕궁경희궁(御製昌德宮慶熙宮), 1774년, 광명전

‘창덕궁에서 정축년을 기억하고, 경희궁에서 임오년을 기억하네. 임오년에는 19세였고, 정축년에는 64였다네. (중략). 어릴때부터 깊은 은혜를 받았으니, 영모당에서 마음을 어떻게 누를 것인가. 통명전에서 몇번을 축수하였는가,광명전에서도 또한 그러했다네, 존호를 받든 것이 어제처럼 아른거리고, 장락전에서 모신 것이 또한 몇년만이었던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읍궁진장(泣弓振藏), 보물 1631-3호,1770년, 옥당(홍문관). 영조가 1770년 7월11일 세손(정조)을 데리고 옥당(홍문관)에서 입직 관헌과 야대(夜對)를 행하면서 내린 어제어필 사언시이다. 영조 77세의 노필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옥당에서 써 보이다.」
은잔에는 새겨 있으나 옥등은 상세하지 않네. 예전엔 여섯 이제는 여덟, 야대할 때 살펴보았지.

OLYMPUS DIGITAL CAMERA3. 읍궁진장(泣弓振藏), 보물 1631-3호,1770년, 집경당.

영조가 1770년 7월 13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열린 주강(晝講)에서 소학(小學) 서문을 읽은 뒤 ‘어제 오늘 더위가 너무 심한 듯하오. ‘학사관(學士館)’과 ‘유윤당(惟允堂)’을 써 내리오’라고 하였다. 이 중에 ‘학사관’은 유신들이 있는 홍문관에 ‘유윤당’은 신하들이 있는 승정원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집경당송(集慶堂頌), 18세기 후반, 집경당

영조때 경희궁 회상전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인 집경당에 대해 지은 송(頌)을 모은 것으로, 홍봉한, 김상복 등 19명이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어제갱진첩(御製賡進帖), 덕유당, 영조가 시행한 친경례는 광해군 이후 120년 만에 시행된 뜻깊은 행사였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보리를 받았는데, 왕세손이 시좌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게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라 명하여 서첩을 만들어서 어보를 찍어 나누어 주었다. ‘ – 「영조실록」 영조 43년(1767)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회상전춘첩」

‘새벽부터 일천문엔 채승을 달았는데 붉은 매화는 옥 난간 앞에 처음 피었네. 제궁에선 잠 경계하여 옥비녀를 벗었고, 당전에선 누에 살피어 잠박을 펼치었도다. 검은칠 쟁반의 행채는 상서를 전하고, 술잔의 초화송은 장수를 축원하였네. 듣자하니 훌륭한 명성 팔방에 두루 퍼져서, 집집마다 배불리 먹고 요임금 성대를 즐긴다네. ‘ – 「춘저록」 詩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봉상루

‘층루가 구중의 푸른 하늘에 날아 나오니, 역력히도 은하수 위에 다리를 놓을 만하네, 봉황이 대궐 뜰에 나는 건 다 성왕의 세대라 축하 소리 들레는 원일에 우소를 연주하도다. ‘ – 「춘저록」 詩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어재갱운첩(御製賡韻帖), 1766~1772년, 숭정전

1590년(선조 23) 명나라 역사서에 조선조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 잡았던 윤근수 등 19인을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부른다. 후에 1771년 그 후손들을 영조가 숭정전에 불러 그 일을 기념하고 신하와 함께 지은 시를 모은 첩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9. 영묘어필(英廟御筆), 1763년, 춘방(세자시강원) 1763년 9월24일 영조가 송감(宋鑑)을 강하고, 시좌하고 있던 왕세손(정조)에게 내린 어필로 이 내용을 춘방에 걸게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나이 70세에 사서(史書)를 강하니, 글에 따라 감개가 일어나서 특별히 너를 불러서 면칙(面飭)한다. 아!원우(元祐).소성(紹聖) 연간의 일을 감계(鑑戒)가 될만한 것이니, 너는 오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잊지 말도록 하라.’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장락전기(長樂殿記), 1762년, 장락전

‘경자년(숙종 46) 이후 10년, 경술년(영조 6)에 두 동조(인원왕후와 선의왕후)를 모시고 여기에 왔었다. 7년이 지나 병진년(영조13)과 그후 경신년(영조 16).계해년(영조 19). 정묘년(영조23)에 또 자성(인원왕후)을 모시고 왔는데 이후 13년 후 경진년(영조 36)에 다시 이 궁궐에 임어하였으니, 바로 기묘년(영조 35) 가레를 행한 다음 해이다. 옛 궁궐은 옛날 그대로인데, 어머니의 얼굴을 어디서 다시 모실 수 있으랴, 추모하는 마음이 한층 더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존현각 일기(尊賢閣日記), 조선후기, 존현각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를 때까지 정조는 경희궁 존현각에서 일기를 썼는데, 이를 ‘존현각 일기’라 한다. 정조는 즉위 5년이 되던 해까지는 스스로 일기를 작성하였다가 이후에는 ‘일성록’이라 하여 신하가 왕을 대신해서 내용을 쓰는 국정일기 형식으로 바꿨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어제견존현각기회(御製見尊賢閣記懷), 1770년, 존현각

이첩은 1770년 윤 5월18일에, 영조가 존현각에 나아가 세손을 인견하고 『시경』에 대해서 묻고 난 뒤 회포를 기록한 산문이다. 이날 영조는 이곳에서 ‘경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주연으로 쓰던 곳인데, 오늘은 할아비 영조와 손자가 이 각에 같이 앉았으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는 심경을 내비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어제을유년대비과방목(御製乙酉年大比科榜目), 1765년, 숭정전

‘영조가 숭정전에서 문무과 시험을 친림하였다. 문과 53인과 무과 228인을 뽑았다. (중략) 이어서 교서관에 명하여 방목(榜目)을 간진(刊進)’하라 하였는데, 대개 지난 을유년을 추모하는 성의(聖意)에서였다. ‘ – 『영조실록』 영조 41년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어제어필북원첩(御製御筆北苑帖), 1770년, 집경당

영조가 존주와 존화의 생각을 읊은 어제어필과 이에 대한 발문이 술록된 탑본 첩이다. 1770년 3월 23일 영조는 자신이 쓴 ‘북쪽 화원 창덕궁 후원 작은 황단에서 일월편을 밝히고 서쪽 언덕 작은 누각에서 풍천을 아로 새기네’ 대자를 집경당 서쪽 창에 걸어 두고 서명응에게 읽어보게 한 다음 호조에서 이를 판각하여 첩으로 만들어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열성어제(列聖御製), 1814년, 동이루

「동이루(東二樓)에서 연구를 짓다. 」
재계하는 밤 엄숙하고 달은 곱기도 한데(어제).
좋이 제군과 더불어 태평을 즐기련다. (어제). – 詩-

OLYMPUS DIGITAL CAMERA7. 어제자성옹자서(御製自醒翁自敍), 1770년, 1770년 1월에 77세의 영조가 평생동안 지니고 있었던 마음가짐을 술회한 글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기회(紀懷), 1762년,

영조가 69세이던 1762년(영조 38) 5월2일에 부모를 그리워하는 심회를 토로한 사언구의 어필 시고다. 이날 영조는 경희궁을 출발하여 선왕의 어진을 모신 창덕궁 진전과 경복궁 북쪽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에 절을 올린 뒤 경복궁 서쪽에 있는 창의궁의 효장묘에 들러 환궁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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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어필, 17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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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어필, 1768년,

영조가 1768년 12월 20일 갑술일을 맞이하여 읊은 시이다. 영조는 이날의 간지가 자신이 태어난 해인 1694년 갑술의 간지와 같아 부모를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경』 육아편을 외운 것이다. 그리고 해당 내용을 글씨로 써서 이를 판각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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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어필, 1768년,

1768년 11월 21일 영조가 전날 내린 눈을 보고 지은 칠언어제구로, 직접 쓰려고 했으나 눈이 비로 바뀌어 그만 두었다고 하자 주위 신하들이 써서 내리기를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어제구를 직접 쓴 후 이를 모사하여 여러 관원에게나누어 주라고 명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변시설
경희궁은 서쪽으로는 한양 도성의 성곽을 경계로 하고 서대문과 서대문로의 북쪽에 입지하고 있다. 18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도성대지도에서 경희궁 주변의 관청을 살펴보면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앞에는 최고통치 기관인 비변사와 군사기관인 군사기관인 훈국신영(訓局新營)이 자리하고 있다. 그 북쪽으로는 제사와 시호를 담당하는 봉상시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내수사가 있다. 남문인 개양문 밑으로는 천문지리 기관인 관상감, 궁의 서쪽 서대문 밖에는 경기감영을 마주하고 있다. 또 경복궁 서쪽의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이 합쳐진 물이 흥화문 앞의 물길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이곳에는 석교가 놓여 있었다. 조선후기 새로운 양궐 체계의 형성은 조선 초 육조거리 중심의 관청 배치에서 벗어나 동궐과 서궐 주변으로 기관들이 재배치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 봉상시물목단자(奉常寺物目單子), 1905년. 봉상시의 물목단자로 시기는 1905년(을사년)이다. 담당관리직이 주사(主事)로 표기되어 있어 통감부 시기의 문서로 추측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대전통편(大典通編), 1785년, 상의원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의 의복을 만들어 바치고 내부의 보화.금보 등을 맡아보던 관아로 경희궁 동쪽 권역에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육전조례(六典條例), 1867년, 관상감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曆數).점산(占算).측후(測候).각루(刻漏)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로 경희궁 개양문 남쪽에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