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2016년)

1. 삼국시대 불상2. 반가사유상3. 통일신라 불상4. 고려, 조선시대5, 석조불상, 철조불상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 한반도에서는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중앙박물관에는 삼국시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잰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를 비롯하여 여러점의 반가사유상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삼산관’과 ‘일월식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출토되는 다른 반가사유상 또한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에 성행했던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가사유상(국보)>

2015년 가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에서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Pensive Bodhisattva)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용수사유상(龍樹思惟像)과 같은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彌勒, 미래의 부처)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무게 37.6kg.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에는 해와 달 장식이 있어 ‘일월식보관’이라 한다. 이렇게 해와 달이 새겨진 관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관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인 조화, 처의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등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또 다른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이 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는 낮은 관을 쓰고 있다.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목걸이만 착용하고 있으며, 하반신에는 율동적인 치맛자락이 다리를 감싸며 대좌를 덮고 있다.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고류사(廣隆寺)의 붉은 소나무로 만든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단순화된 삼산보관 양식과 너그러운 이맛전 그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촐한 입매에서 풍기는 담담한 미소를 보고 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한국인의 핏줄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환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
– 최순우, 「미륵보살반가상」, 1980년 –


금동반가사유상, 보물, 삼국시대 7세기.

네모난 대좌위에 앉아 있는 이 금동불상은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얼굴, 몸통, 팔 등 신체를 극도로 가늘고 길게 표현한 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는 보관 장식을 연결했던 구멍이 남아 있고, 어깨부터 다리 아래까지 걸친 장신구는 긴 신체를 더욱 강조한다. 연화대좌 아래의 네모난 대좌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일본 반가사유상에도 많이 남아있는 대좌 모양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머리에 넝쿨무늬가 표현된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 반가사유상으로 콧수염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머리 뒤쪽에 꽂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가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경남 양산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4각형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를 놓고 있는데 보살상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보인다.

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표현한 상이다. 넝쿨과 꽃모양으로 장식한 보관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온화한 미소와 살포시 댄 손가락, 유려한 옷주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머리 뒤에는 광배꽂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있는데 비해 이 반가사유상은 손바닥 전체로 뺨을 감싸듯이 받치고 있다. 머리 윗부분에는 광배를 결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