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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불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금제여래입상(국보)이다. 경주 구황동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순금으로 만든 높이 14 cm의 작은 불상으로 대좌와 광배가 온전히 남아 있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양감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어깨는 좁은 편이며 앞쪽 옷주름은 U자형을 하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머리의 신체의 비례가 적절하며 조각수법도 섬세한 편이다. 불상이 있던 사리함에는 조성경위가 글자로 새겨져 있는데, 이 석탑이 세워졌던 692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하는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통일신라만의 고유한 양식이 많이 형성되었다. 통일신라 불상이나 석탑을 보면 고려시대에 비해서 조형미나 조각수법, 예술적인 표현 등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고구려 불상에서 보여주었던 생동감 넘치고, 힘있는 모습은 다소 줄어들고 후대에 들어서는 정형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국보, 경주 구황동 황복사터 삼층석탑 출토, 692년>

두툼한 옷차림에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어 692년 석탑을 조성할 때 같이 봉인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왼쪽)>


<옆에서 본 모습(오른쪽)>


<뒤에서 본 모습>

황복사(皇福寺)로 전해오는 절터의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사리함 뚜껑에 새긴 글에 따르면 신문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692년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어머니 신목태후와 함께 석탑을 세웠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聖德王)이 금제 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에 안치하였다. 불입상은 얼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두툼한 옷주름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어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얇은 옷주름으로 강조된 불좌상의 풍만한 신체는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706년에 봉인한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불상이 발견된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뚜껑에는 성덕왕이 부왕인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2구를 비롯하여 사리 등을 넣었다는 조성내력을기록해 두고 있다.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뚜껑>

<사리함에서 같이 발견된 금제 여래입상(국고)과 여래좌상(국보)>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