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중국실] 사후세계, 명기(明器)와 도용(陶俑)

1. 예기(禮器)2. 명기와 도용, 3. 신선사상과 도교4. 불비상과 불상5. 도자기6. 중국회화

도용(陶俑)은 중국에서 죽은이와 함께 묻는 인물.동물의 상을 말하며 명기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의 사람이나 가축 등을 본 떠 만들어 죽은이를 저승으로 호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국시대 순장제도가 사라지면서 예기(禮器)제도가 무의미해지고 껴묻거리의 종류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대 이전에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가 주로 매장되었지만, 한대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인물과 동물도용 제작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매장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순장의 풍습이 없어지고, 사람을 대신하게 된 도용은 예술적으로 조형미나 표현이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 진시황의 능에서 발견된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표현한 도용이 대표적이다. 전한시대에는 진시황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북조에서는 조형미가 풍부한 도용들이, 당대에서는 귀족생활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당삼채로 만들어진 도용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덤문(墓門, Stone Entrance of a Tomb), 북제, 전 허베이(河北省) 츠저우(磁州) 출토, 중국 한대(漢) 문화를 대표하는 석실고분 출입문이다. 서역문화의 영향을 받아 화상석, 벽화 등  회화적인 요소가 강한 장식들이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 위쪽 기둥인 반달모양의 상인방이다. 청룡, 백호,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무덩방(墓室) 입구에 세웠던 문이다. 사자모양의 받침(信防石) 위에 기둥(문설주)을 세웠고 기둥을 가로질러 아래에는 하인방(下引枋)을 두고 위에는 상인방(上引枋)을 얹은 구조이다. 사자모양 받침 윗면에는 지금은 없어진 문짝을 연결했던 구멍이 남아 있다. 석문의 문설주와 하인방(문지방)에는 구름과 연꽃, 덩굴 무늬를 새겼고 반원모양 상인방에는 구름 속에 청룡과 백호,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북제 무평 연간(570~576년)의 무덤의 것으로 전해지는 이 묘문은 전체적인 구조와 사자모양의 받침 그리고 문양장식이 북제의 다른 묘문과 같은 형식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중국의 신앙과 종교문화
고대인들은 현실의 세계가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생각해서 죽은 이를 매장할 때 수많은 사람을 순장하거나 많은 껴묻거리를 묻은 후장 풍습을 행하였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과 명기(明器), 도용(陶俑)은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한대 이후 도교의 발전으로 신선사상이 널리 퍼짐에 따라, 사람들은 서왕모(西王母)를 중심으로 한 장생불사의 세계로 가기를 희구하였다. 한편, 동한대(東漢, 25~220년)에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극락과 지옥의 구분과 윤회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다. 남북조시대(420~589년)에는 여러 왕조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사찰 건립과 불상 조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대에는 특히 사실적이 풍만한 모습의 불상이 제작되었으며, 송대에는 인간화된 불상이 조성되었다. 원대와 명청대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 남북조, 채회도기. 힘이 넘치는 사실성이 돋보이는 도용이다. 서역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서역지방을 통해서 외국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인 남북조시대까지는 다리가 짧은 중국 토종말 형태로 만들어지진다. 아래까지 늘어지는 화려한 안장을 하고 있으며 가습과 엉덩이에 장신구를 하고 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슬픈표정을 하고 있으며 마치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준마의 형상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명기(明器, Funerary Goods)와 도용(陶俑, Tomb Figurines)
중국 진한대(秦.漢, 기원전 221~ 기원후 220년)에는 후장제도(厚葬制度)가 유행하면서 상류층 무덤의 부장품 종류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문기, 마구류가 주로 매장되었지만, 한대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인물과 동물 도용, 가옥.부뚜막.축사 등의 명기와 도용이 많은 수량 출토되었다. 또한 당대(唐)에는 삼채(三彩)로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을 화려하게 제작하여 매장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성과 여성, 男女俑, 서한, 채회도기, 허리띠 맨 남성, 도포입은 남성, 바람막이 모자를 쓴 무사, 彩繪男俑, 북위. 도포입은 남성은 작은 관을 쓰고 무릎까지 오는 도포를 입고 있다. 손에 구멍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뚜막, 竈形明器, 서한, 갈유도기(왼쪽), 녹유도기(오른쪽)

OLYMPUS DIGITAL CAMERA화장실 건물, 厠型明器, 동한, 도기

OLYMPUS DIGITAL CAMERA무사와 여인도용, 彩繪 武士.女人 陶俑, 북조

OLYMPUS DIGITAL CAMERA호복입은 인물과 여인도용, 彩繪 胡福人物.女人 陶俑, 당

OLYMPUS DIGITAL CAMERA말, 당, 도기. 당대(唐) 문화를 대표한 도용이다. 서역문화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당나라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타, 당, 채회도기

당대 초기 실크로드가 번영하며 무역이 성행하면서 낙타의 수요가 많아져 전리품, 조공, 상품으로 중국으로 대량 수입된다. 대부분 쌍봉낙타이고 단봉낙타는 아프리카 북부, 인도 등에서 직수입된 것으로 소량 출토된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소, 당, 도기

동한시기 화상석에서 우경의 모습이 보이며 수대(隨)부터 마차를 끌거나 경작에 이용된 소의 형상이 도용으로 제작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뿔과 골격이 사실적으로 보이며 지금의 황소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로 우직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장옥(葬玉, Funerary Jades)
고대 중국인들은 옥(玉)이 시신을 보호하고 죽은 이를 선계(仙界)로 인도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신체의 아홉개의 구멍을 금옥(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여 시신에 옥을 부장했는데, 이를 장옥이라 한다. 한대(漢)의 장옥은 용도에 따라 입을 막는 함옥(含玉), 신체의 구멍을 막는 색옥(索玉), 손에 쥐는 옥돈(玉豚), 가슴에 얹는 옥벽(玉璧)으로 구분된다. 매미모양의 함옥은 부활을 의미하고 색옥은 육체의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며 손에 쥔 돼지모양의 옥돈은 내세에 먹을 양식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2. 옥벽, 玉璧, 한, 시신의 가슴에 얹는 둥근 형태 옥벽이다.

OLYMPUS DIGITAL CAMERA3, 옥돈, 玉豚, 한, 시신의 손에 쥐어주는 돼지모양의 옥돈이다. 사후세계의 식량을 의미한다.

OLYMPUS DIGITAL CAMERA4. 옥돈, 玉豚, 한

OLYMPUS DIGITAL CAMERA5, 6, 7. 색옥, 塞玉, 한, 정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시신의 9개 구멍을 막는 용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8. 함옥, 含玉, 한. 부할을 상징하는 매미 형상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9, 옥편, 玉片, 한,

중국미술의 흐름
중국은 황허 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광활한 영토에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다채로운 문화가 전개되었다. 최초의 하(夏)왕조(기원전 21~ 기원전 16세기)를 거쳐 상(商, 기원전 16 ~ 기원전 11세기)과 주(周,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256년)로 이어지며 국가의 틀이 마련되었고, 정치적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 ~ 기원전 221년)에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제시하는 제자백가의 등장으로 사상과 학문이 꽃을 피운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 기원전 221~ 기원전 206년)과 뒤이은 한(漢, 기원전 206~ 기원후 220년)은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정치.사회 제도를 재정비하며 통합을 이루어 나갔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에서 보듯, 이 시기에는 사후에도 현실과 같은 삶이 지속된다는 믿음에서 명기(明器)와 도용(陶俑), 공예품을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221~589년)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융성하여 중국 전역에 사찰과 석굴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불교 사상과 미술양식은 아시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수.당대(隋.唐, 581~907년)에는 강건한 북조문화와 우아한 남조문화가 융합되고, 여기에 외래문화가 적극 수용되어 국제적 성격의 문화가 난만한 가운데, 금속공예품과 삼채(三彩)도자기가 특히 발달하였다. 송대(宋, 960~1279년)에 이르면 전국의 가마(窯)에서 각기 개성을 살린 도자기들이 제작되어 중국 도자의 다양한 전형을 이룬다. 한편, 오대(五代, 907~960년)에는 자연의 장엄함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산수화와 함께 시서화의 예술인 문인화(文人畵)가 태동하고, 원대(元, 1271~1368년)에는 원사대가(元四大家)로 대표되는 보고적인 문인화풍으로 이어진다. 명대(明, 1369~1644년)에는 고아한 사상과 취향의 문인화가와 궁정 소속의 화원들이 서로 다른 양식으로 화단을 풍미했으며, 청대(淸, 1633~1912년)에는 다양한 화파가 형성되고 원근법이 적용된 서양화풍이 유행하면서 더욱 다채롭고 개성있는 회화 세계가 펼쳐진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