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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동리산 태안사, 통일신라 선종 동리산파 중심 사찰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자락에 있는 태안사(泰安寺)이다. 통일신라 선종을 이끌었던 승려 혜철이 크게 중창하면서 구산선문 동리산파 중심사찰이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광자대사 윤다가 크게 중창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았다. 고려중기 송광사가 수선결사의 중심사찰이 되면서 그 위상이 축소되었으나, 조선초 효령대군이 머물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찰이 되었다. 한때 40여동의 건물이 있었던 큰 사찰이었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으며 최근에 전각들이 다시 중건되면서 큰 사찰로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태안사는 동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산중 사찰로 가람배치에 격식을 크게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입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강당 건물인 보제루와 대웅전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경내 마당에는 석탑이 없고 아래쪽 연못에 삼층석탑이 있다. 경내에는 불전보다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인 요사채 건물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보제루 아래에는 광자대사탑(보물), 탑비(보물)를 비롯한 승려들의 승탑들이 세워져 있으며, 대웅전 뒷편에는 사실상 태안사를 창건한 혜철의 승탑(보물)와 탑비가 있다. 석탑이나 불전보다는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찰이다.

<곡성 태안사>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고려중기까지는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이었으나 수선결사 이후 송광사가 지역 중심사찰이 되면서 그 위상이 낮아 졌다.

<능파각>

태안사의 첫번째 출입문인 능파각, 조선 영조 때 중건한 건물이다. 계곡 양쪽에 석축을 쌓고 올린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태안사 오르는 길>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선종계열 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깊은 산중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산지사찰이다.

<태안사 일주문>

사찰 일주문 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조선후기에 고쳐지었다. 앞면 1칸의 2개의 기둥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승탑들>

광자대사탑(보물)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승탑들을 볼 수 있다. 지역 중심사찰로서 뛰어난 승려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

<광자대사탑(보물)>

고려초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승려 광자대사 윤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전체적인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세부적인 조각수법이나 섬세한 표현 등이 돋보인다.

<광자대사탑비(보물)>

고려초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광자대사 윤다의 행적과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적은 광자대사탑비(보물)이다. 현재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이 온전히 있으며, 글이 적힌 비몸은 일부 조각만 남아 있다. 비봄이 파손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지만 옛기록에 따르면 광자대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보제루로 들어가는 길>

<대웅전>

태안사 주불전인 대웅전.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하였다.

<삼성각>

<적인선사탑(보물)>

대웅전 뒷편 언덕에 있는  적인선사탑(보물). 통일신라 때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적인선사탑비>

<요사채인 염화실>

<보제루>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강당건물인 보제루. 강당은 불법을 강론하고 신자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적묵당>

마당 동쪽편에 있는 큰 요사채인 적묵당이다. 앞면 7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요사채이다.

<적묵당 안쪽에 있는 요사채인 보림원>

<요사채>

서쪽편에 있는 해회당.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전통적 요사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태인사 아래쪽에 있는 둥근 모양의 연못>

가운데 섬에 삼층석탑이 있다.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곡성 태안사,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 2월에 신성한 승려 세 명이 처음 세웠다고 「동리산태안사사적」에 전한다. 그 뒤 1대조사 헤철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西堂地藏)에게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신라 구선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하였다. 풍수지리사상의 원조인 2대조사 도선국사도 태안사에서 10년간 머물며 혜철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3대조사 광자대사가 절을 고쳐 지었는데, 이때는 건물 40여 동 110여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며 법당에는 높이가 1.4 m인 약사여래철불을 모셨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무르고 완당을 건축하였으며, 대바라(큰바라)를 만들고 완당완기를 남겼다.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고쳐 지어 옛 가람의 규모를 되찾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대웅전이 불타는 등 피해를 크게 입었으며 일주문과 능파각, 보제루, 해회당, 선원, 미타전(염화실)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태인사 경내에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 조류청정탑(보물 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274호), 광자대사탑비(보물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956호), 천순이라는 명문이 있는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 능파각,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 삼층석탑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4점이 있는 천년 고찰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