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유적 전시관] 백제 무왕이 조성한 궁성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9호)은 백제 무왕이 조성한 왕궁지와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이 있는 곳으로 경복궁처럼 앞쪽은 정전을 중심으로 의례적인 공간이, 뒷쪽은 업무, 생활공간이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에 사찰로 바뀌면서 중심부 궁성 건물은 없어졌지만 앞쪽의 정전 영역과 뒷편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들이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와적기단과 같은 건축양식과 기와같은 건축부재와 백제인이 사용했던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유적지 입구에는 백제 무왕이 궁성을 조성했을 때부터 사찰로 변한 이후까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유적 전시관이 있다.  왕궁터 전체의 모습과 당시의 생활상의 모습 등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기와 등 건축 부재를 중심으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백제 왕궁터가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백제 궁성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유적 전시관.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했던 유적지에 세워진 유물전시관이다. 1989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진행중인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유적지 모형. 중국 궁궐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북 490 m, 동서 240 m이 직사각형 공간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후대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앞쪽에는 정전을 중심으로 한 의례영역, 가운데에는 왕실의 업무와 생활공간이, 뒷편에 정원이 배치되어 있다. 북서쪽 모퉁이에 왕실 물품을 제작하기 위한 공방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유적지. 백제말 이후 사찰로 바뀌면서 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영역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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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지 주요 건물터 배치도.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사적 408호)은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의 왕궁유적과 후대의 사찰유적이 같은 지역에 위치한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발 40 m내외의 구릉에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주변에 있는 돌, 점토 등을 사용하여 폭 3 m, 남북 490 m, 동서 240 m의 장방형 담장을 조성하였다. 왕궁 내부는 1:1 또는 2:1의 비율로 공간을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전체 공간을 나누어 남측은 의례와 생활공간, 북측은 후원과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남측의 의례.생활공간에는 4단의 경사지에 전반부는 의례공간으로, 후반부는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유적으로는 의례.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와 백제 정원유적, 왕궁 내의 중요 필수품인 금, 유리, 동을 가공하는 공방지, 백제 최고의 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백제 왕궁은 무왕대에 건립되어 백제 말기를 전후하여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사찰을 지여 통일신라까지 경영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측 일부에서만 부분적으로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 내부 구조가 확인된 곳으로서 왕궁의 조성계획과 건물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품,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수부’가 새겨진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제품,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전달린 토기,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정전에 해당하는 대형 건물터.

건물지
왕궁리유적에서 건물지는 지금까지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 등 총 21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건물지는 기단의 축조 재료에 의해 석축기단 건물과 와적기단 건물로 구분되며, 초석의 유무에 따라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 적심의 조성방법에 따라 적심건물과 토심적심건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 건물지는 대부분 초석을 사용한 기단 건물지와 와적기단건물지, 굴립주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다. 건물지의 위치를 보면 정전 건물지는 중문의 중심축과 같은 선상에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금당지와 강당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나 동편에 치우쳐 있다. 정전 건물지는 왕궁리 유적의 중문에서 들어가면 접할 수 있는 첫번째 건물이며,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주변에서 수부명 기와가 출토되고 토심적심의 특이한 기초공법이 확인됨에 따라 정사를 돌보던 곳이나 의례,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수직횡렬식 기단, 백제, 부여 군수리. 와적기단이란 기와로 건물 기단을 쌓은 것을 말한다. 사용했던 기와를 재활용하여 쌓는 것으로 석축기단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진다.

와적 기단이란?
기단은 건물의 기초 부분으로서 흙이나 돌로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 건물의 경계를 나타내고 빗물이나 습기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다. 와적기단은 건물의 기단부를 기와로 쌓은 것으로서 대부분 지붕에서 사용했던 기와를 재활용하고 있다. 와적기단은 석축기단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지만 축조방법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장식성이 돋보이고 쉽게 만들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와적기단는 고구려 유적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경주지역에서는 천관사지, 인왕동 건물 등 일부에서 확인되었고 주로 백제지역 중에서도 부여와 익산지역에서 확인되는 독특한 기단 축조 수법이다. 또한 이러한 기단 형태는 일본 고대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백제와 신라, 일본과의 문화적인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합장식 기단, 백제, 부여 군수리

OLYMPUS DIGITAL CAMERA평적식 기단, 백제, 부여 관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평적식 기단, 백제, 부여 왕흥사지

백제 와적기단
와적기단은 군수리사지에서 처음 조사된 이후 금성산 건물지, 왕흥사지, 관북리유적, 왕궁리유적 등 백제 사비기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백제 와적기단의 축조방식은 광적식, 합장식, 수직횡렬식, 복합식 등 4종류로 구분된다. 평적식은 암.수키와 및 점토를 이용하여 쌓아 올린 것으로 평면에서 보면 한줄 혹은 2줄 이상의 기와열로 이루어진 가장 단순하고 실용적인 ㅎ여태로 부여지역과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합장식은 기단부를 일정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마다 기와를 서로 엇갈리게 세워서 쌓아 앞에서 보면 마치 생선뼈와 같이 보여 장식성이 돋보이는 것으로 군수리사지에서 확인된다. 수직횡렬식은은 기와를 수직으로 세워 서로 겹치지 않게 연결한 것으로 군수리사지 중앙기단의 동.서.북변에서 확인된다. 복합식은 기단의 하부는 수직횡렬식으로 쌓고 상부는 평적식으로 쌓은 것으로 군수리사지 1호 건물지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와적기단은 기와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돌도 함께 사용하여 만들었다. (왕궁리유적 전시장,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평적식 기단,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유적 와적기단 건물지

왕궁리유적에서는 평적식 와적기단 건물 3기가 확인되었으며 세부 형태는 다시 2종류로 구분된다. 동서석축 3 앞에서 조사된 2개의 방이 설치된 와적기단건물지는 암키와를 종 방향으로 2열씩 평적식으로 축조하였는데, 부여 금성산 건물지와 같이 기단의 일부는 석재이고 나머지부분은 와적기단으로 축조하였다. 또한 동시석축1에 덧붙여진 돌출형태의 와적기단건물지는 암키왈 양쪽 면을 맟추어 2열로 기단을 쌓았는데 이러한 형태는 평적식 와적기단과 동일한 형태이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놓일 자리에는 기와를 쌓지 않고 기둥 외면에 암키와를 세워놓아 평적식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수막새.  한성기백제부터 사비기까지 사용된 다양한 문양의 백제 수막새이다.

백제 기와는 한성시대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고분 등에서는 볼룸감이 적은 선과 원으로 처리된 초화문, 초목문, 원문, 능형문, 인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웅진 천도 이후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연화문 수막새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연판의 형태는 끝이 솟거나 원형돌기가 달려 있고 볼륨감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기와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제작기술도 발전하여 연화문 수막새의 연꽃 끝부분이 강하게 변화되며 연꽃잎의 끝이 하트모양으로 갈라지고, 연판 내에 인동문과 꽃술 장식이 나타난다. 또한 백제 말기로 가면 연화문 이외에 무문과 태국문 수막새도 제작된다. 익산지역에서는 백제 후기 수막새 기와에서 볼 수 있는 하트형 연판과 인동.꽃술자엽장식, 연꽃잎 끝의 단면이 S자 형태로 구부러진 연화문 수막새와 무문, 태극문 수막새가 출토되고 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수막새이다. 사비기 수막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무문, 태극문 수막새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무문과 태극문 수막새는 백제 말기에 나타나는 막새형태로서 왕궁리유적에서는 13점과 37점이 수습되어 폭넓게 사용된 막새기와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전체 수막새 중 연화문 수막새가 90%를 차지하여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연화문 수막새의 연판 형태와 연꽃 내 장식여부, 자방의 연자수 및 배열상태에 따라서 크게 5종류로 구분되고 세분하면 10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연화문 수막새의 연판은 대부분 8엽 단판으로 연판의 형태가 하트형으로 볼륨이 낮은 특징이 있다. 왕궁리유적 출토 연화문 수막새는 부여지역 출토 연화문 수막새와 전체적인 형태에서는 유사하지만 무늬 세부 형태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익산지역의 미륵사지나 제석사지에서도 일부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되는 수막새와 같은 종류가 보이고 있지만 유적에 따라서 대표적인 수막새의 문양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연통장식, 왕궁리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연통장식(모형)

연가는 배연시설의 일부로써 굴뚝 상부에 놓이는 연봉형 장식이다. 연가의 형태는 연봉 아래에 연기가 빠져 나가도록 원형, 장방형, 하트형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래로 원통형의 연통이 연결된다. 연가는 굴뚝의 상부를 장식하고 연기 배출 외에도 비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바람에 의한 연기의 역류를 막는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가와 연통은 익산 왕궁리유적, 부여 동남리유적, 화지산유적, 능산리사지 등 백제시대 중요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암키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수키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백제의 지붕.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의 형태를 참조하여 재현한 백제의 지붕.

일반적으로 기와지붕은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와 암키와로 이어 덮게 된다. 이렇게 이어진 기와는 처마 끝에 와서 각기 끝막음을 하게 되는데, 막새는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기와로 수키와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부착한 수막새와 암키와 끝에 장방형의 드림새를 부착한 암막새로 구분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기와지붕의 구조 및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동서석축3 말단 부 석축 앞쪽에 서벽 내출의 건물지 주변에서 지붕에 얹혀 있던 암키와와 수키와들이 그대로 내려앉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특히 면에 도장이 찍힌 암키와, 연화문 수막새도 함께 지봉의 모양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수부’명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인장와(印章瓦)란?
인장와는 기와 제작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하여 평기와(수키와, 암키와)의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로서 인각와, 인명와, 명문와 등으로도 불리운다. 도장의 형태는 장방형, 타원형, 원형으로 하나의 도장에는 글자 1자에서 4자까지 새기고 있는데, 한자씩 새긴 도장 두개를 연결하여 사용한 것도 있다. 기와에 도장을 찍은 목적은 기와 생산과정 또는 검수과정에서 생산지나 생산자, 생산연대, 기와의 사용처 등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장와는 공주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나 대부분 부여와 익산지역의 백제시대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백제 후기의 특징적인 기와로서 최근에는 청주, 대전, 금산, 논산, 정읍, 임실, 여수 지역에서도 몇점씩 확인되고 있다. 익산지역에서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 많은 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었으며, 제석사지와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석불사지 등에서는 소량만 수습되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 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인장와는 기와 제작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이다. 기와생산과정 또는 검수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부여와 익산지역 백제 유적에서 나타난다. 왕궁리유적에서도 많은 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총60여 종의 인장와가 출토되었는데 도장의 내용으로 보면 행정구역의 명칭이나 연대가 표시된 것, 간지와 생산자의 이름을 한글자씩 표시한 것, 특별한 표시를 위해 한 글자만을 찍은 것, 글자가 아닌 기호를 표시한 것 등으로 구분된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  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대형항아리. 백제, 익산 왕궁리사지

대형항아리는 토기의 높이가 60 cm에서부터 100 cm가 넘는 토기로서 편으로 출토된 토기를 복원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인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놓은 상태로 확인되어 완전한 형태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왕궁리유적에서는 토기의 형태복원이 가능한 10여개의 대형항아리가 확인되었는데, 토기의 일부만 수습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는 것도 수십 개체분에 이른다. 백제 후기의 대형항아리는 어깨부분이 가장 넓고 둥근 바닥을 하고 있으며, 표면에는 침선문 또는 자리문이 시문되어 있다. 통일신라기의 대형항아리는 나팔형으로 벌어진 목과 어깨에 파상문과 돌선대가 돌려져 있고 표면에는 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백제시대 대형항아리는 대부분 서측 담장 내부에서 확인되었으며, 왕궁리유적에서 가장 큰 토기인 통일신라기의 대형항아리는 사찰유적인 금당지 서편 건물지 내부에서 출토되었다. 대형항아리는 유적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서측 담장 주변의 생산유적이나 사찰유적의 외곽에서 수습되었고, 땅을 파고 묻어 놓은 상태로 출토됨에 따라 저장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항아리는 왕궁리유적 외에 미륵사지, 부여 관북리유적, 능산리사지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에서는 완, 합, 접시, 뚜껑 등 다양한 형태가 출토되었다. 이들 중 완, 합, 전달린토기 등은 부여 관북리유적 출토 회색토기와 같은 종류로 정교하게 만들어 졌다. 이들 토기는 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주로 왕궁터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완,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전달린 토기,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있는 완,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작은완,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토기 뚜껑,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등잔,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토기는 완, 합, 전달린토기, 접시, 뚜껑, 자배기, 호, 대호, 등잔, 병, 개배, 고배, 기대, 벼루, 시루, 파수부토기, 부뚜막형토기 등이다. 완, 합, 전달린토기 등은 백제 왕궁터로 전하는 부여 관북리유적 출토 회색토기와 같은 종류로 고운 태토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토기가 미륵사지에서는 몇 점 출토되었으나 백제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있다. 개배, 고배, 기대, 벼루, 부뚜막형토기 등은 수점 또는 일부 편으로 출토되었는데, 기록이나 특별한 의식과 관련된 토기로 추정되며 토제수각(짐승 모양의 다리)은 대형토기의 다리로서 의식과 관련된 토기로 보인다.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주변 사찰유적이나 고분유적 출토 유물과는 구분되고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종이 출토되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있는 완, 부여 관북리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전달린 토기, 부여 관북리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찍은 기와 부여 관북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찍은 기와, 부여 관북리 유적

부여 관북리유적은 부소산성 남측에 위치한 곳으로 백제 사비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고 2001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조사결과 왕궁리유적의 정전건물지와 축조방법과 규모가 같은 대형건물지와 각종 건물지, 금.은.금동.철.유리제품을 생산하던 공방터, 도로, 목곽, 수조, 과일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관북리유적에서는 회색토기라고 하는 회색, 회백색을 띠는 합, 완, 전달린토기, 접시 등이 건물지 주변 배수로에서 뚜껑과 함께 포개진 상태로 집중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는 고운 점토로 정교하게 제작되어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와는 쉽게 구분 할 수 있어서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쌍릉(사적 87호) 중 대왕묘. 왕궁리에 궁성을 조성한 백제 무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왕궁리 북쪽으로 수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왕은 누구일까?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이름은 장(璋)이다. 미륵사지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무왕은 “어머니가 연못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 이름은 서동으로 오금산 기슭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신라에 들어가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무왕은 왕권강화를 통하여 백제의 새로운 도약을 꾀한 왕이다. 즉 백제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하자 군사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후 위덕왕.혜왕.법왕의 3대에 걸친 약 50년간 여러 방면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행해지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무왕은 이를 극복하고 성왕 이후 실추된 벡제의 위상을 재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탄생과 성장배경이 된 익산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한 익산지역에는 궁궐지로서 왕궁리유적이 남아 있다.

무왕은 48년간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즉 위덕왕.혜왕.법왕 대의 실추된 왕권을 재확립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익산 지역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무왕3년 이박산성 전투였다. 이 전투 이후 무왕은 익산지역에 왕궁리유적과 같은 궁성의 운영, 미륵사지.제석사지와 같은 사찰의 창건과 더불어 익산토성, 서토성 등 관방유적 운영을 통하여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력이 어머니와 관련된 익산 지역 출신 세력들이었다. 이와 같이 마한과 관련된 익산 지역의 신진 세력을 바탕으로 종래의 8대성 귀족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여 대 신라 전을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대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백제의 위상을 드높였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왕궁리 유적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