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특별전, 세계유산 백제] 백제의 도성과 행정

1. 도성과 행정, 2. 건축, 3. 무기와 전쟁, 4. 일상생활, 5. 사찰과 불교문화, 6. 능묘, 7.국제교류, 8. 지방통치

백제는 기원 전후 무렵 한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성장했으며, 웅진기를 거쳐 성왕때인 538년에 사비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성과 웅진기 도성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많지 않으나, 부여에서는 관북리 옛 왕궁터를 중심으로 여려 유물들이 출토되어 도성과 행정제도에 대한 역사기록들이 확인되고 있다. 사비기 백제는 성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국가체제가 새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지역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백제는 부여에서는금강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도성을 쌓았다.  도성은 관북리에 위치한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에 동서-남북방향의 도로가, 부소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 도성은 금강과 부소산 등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성 내부는 중.상.하.전.후부의 5부(府)로, 부는 다시 항(巷)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부’ 등 행정구역 명칭이 새겨진 돌과 기와.목간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소산성 아래 옛 부여현 관아가 있던 관북리 일대>

삼국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 왕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관광지와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왕궁터를 정비해 놓았다.

도성(都城)
도성은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계급인 왕과 귀족들이 살았던 공간이므로 국가의 성립과 성장의 과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산과 평야가 어우러진 지형의 특징을 살려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하고 여기에 중국의 도성제(都城制) 요소를 추가하여 도성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사비도성에 잘 남아 있습니다. 왕궁이 있던 부여 관북리 유적, 궁궐의 후원이자 유사시 왕궁과 도성을 방어하는 산성의 역할을 했던 부소산성, 왕궁 바깥의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나성 등 완전한 도성체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성 안팎에서 발견된 자료를 통해 당시의 생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도성제는 왜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일본 아스카 시대의 도성제 성립에 기여하였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상부전부천자차이’ 글자를 새긴 표석, 6세기 부여 동남리>

정림사지 북서쪽 동남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파손되어 전체를 알 수 없지만, 대략 ‘상부와 전부가 이곳에서 나뉜다’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5부5황으로 편제된 사비도성에서 현재의 ‘도로 표지석’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행정
백제의 행정구역은 성왕이 왕권의 안정과 집권력 강화를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도읍지인 사비도성의 구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비도성은 나성으로 둘러싸였는데, 이 나성 안에 왕궁과 각종 행정관서가 건축되었습니다. 나성 내부는 상부.중부.하부.전부.후부의 5부로 편제하고, 각 부는 다시 5항(巷)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비도성에서 출토된 표석과 목간, 도장 찍은 기와에 따르면 ‘동서남북중’ 또는 ‘전후상중하’ 등의 방위명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밖에 문서행정이 실시되었음을 알려 주는 벼루와 목간, 건축과 토목 뿐만 아니라 조세의 수취, 물자 유통과 관련된 도량형 등도 당시의 행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수부’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부여 관북리>

OLYMPUS DIGITAL CAMERA<’수부’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전반, 부여 부소산성>

OLYMPUS DIGITAL CAMERA<’수부’도장을 찍은 암키와,  7세기, 익산 왕궁리>

‘수부(首府)’는 최고 집권층이 거주하는 중앙 행정 부설르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까지 ‘수부’도장을 찍은 기와는 왕궁이 있는 핵심지역에서만 출토되어 사용의 제한이 있었음을 짐작케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상부갑와’ 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부여 부소산성>

OLYMPUS DIGITAL CAMERA<’대통’ 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전반, 공주 반죽동>

OLYMPUS DIGITAL CAMERA<’대통’ 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전반, 부여 부소산성>

대통(大通)은 중국 양(梁) 무제(武帝, 재위 502~549년)가 527년부터 529년까지 사용한 연호입니다. 이 기와의 출토는 사비도성의 중요한 방어시설인 부소산성이 538년 천도 이전부터 축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제첨축, 6~7세기, 부여 쌍북리>

제첨축은 문자를 기입하는 제첨과 두루마리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문서 두루마리 위에 꽂는 일종의 색인표 또는 책갈피입니다. 두루마리를 펼쳐서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제첨축 내용을 먼저 읽고 문서의 개요를 파악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되, 6~7세기, 부여 쌍북리>

되(量)는 부피를 측ㅈ어하는 그릇으로서 승(升)이라고도 합니다. 홈을 짜 맞추어 사각 용기로 복원하면 내부의 크기는 27.6 x 27.95 x 8.2 cm, 용적은 6,326 ml가 된다. 당척(唐尺)으로 계산했을 때 10되, 즉 1말(斗) 용량입니다. 한 변의 길이는 29.3~29.6 cm로 자의 길이와 거의 같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자, 6~7세기, 부여 쌍북리>

자(尺)는 길이의 기준으로 도량형의 기본입니다. 백제 한성기에는 중국의 후한척(後漢尺, 23cm 내외), 웅진기와 사비기에는 남조척(南朝尺, 25 cm 내외)이 도입되었습니다. 쌍북리 출토품은 눈금의 간격이 1.45 cm로 복원 길이 29.1 cm의 당척으로 생각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돌추, 6~7세기, 부여 관북리>

형(衡)은 무게를 재는 저울이나 추 외에도 무게 단위가 적용된 물건들을 의미합니다. 백제의 추는 무게가 51 g ~ 680 g까지 편차가 심하고, 배수 관계 등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주로 상대적인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 ’일근’글자를 새긴 돌거푸집, 6~7세기 부여 구아리>

1근 무게의 금속제품을 생산할 때 사용된 것으로, 백제의 무게 단위가 ‘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깥면에는 ‘大王天’이라는 글씨가 있어 중요 행정관서에서 쓰는 물건을 만들었음을 알려줍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대통사’ 글씨를 새긴 토제 벼루, 6세기 전반, 공주 공산성>

『삼국유사』에는 성왕(재위 523~ 554년)이 웅진에 ‘대통사’를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공주지역에서 사찰 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2년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 건물지에서 출토된 ‘대통사’가 새겨진 벼루는 대통사가 실제 존재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토제벼루,  6세기 부여 능산리사지>

OLYMPUS DIGITAL CAMERA<토제벼루, 5세기 후반 ~ 6세기, 공주 공산성>

OLYMPUS DIGITAL CAMERA<토제벼루, 7세기, 익산 왕궁리>

OLYMPUS DIGITAL CAMERA<5. 손칼, 6~7세기, 부소산성, 6. 숫돌, 6~7세기, 부소산성, 8. 토제 등잔, 6세기, 공주 공산성>

OLYMPUS DIGITAL CAMERA<7. 목간 부스러기, 6세기, 부여 능산리사지>

목간의 재활용
이미 묵서가 끝난 목간이라고 해도 표면을 손칼 따위의 날카로운 도구로 깎아내면 여러 번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목간을 깎아낸 부스러기에는 글자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패용이 가능한 숫돌과 손칼은 목간의 재활용에 꼭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1. ‘서부후항’이 쓰인 목간, 6~7세기, 부여 궁남지, 2. ‘중부나솔득진’이 쓰인 목간, 6~7세기, 부여 구아리, 3. 외경부가 쓰인 목간, 6~7세기, 부여 쌍북리>

1. ‘서부후항’에 사는 사달사가 중구 4인, 소구 2인과 매라성 법리원의 수전 오형을 개간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행정구역과 인명, 호구, 도량형 등 각종 사회 제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2. ’중부나솔독진’이 적혀 있습니다. 이는 행정구역명.관등명.인명이 순으로 백제 일반적인 인명 기술과 일치합니다. 나솔은 백제 16관등 중 5번째에 해당합니다. 3.’외경부철’, 뒷면에는 ‘대면십량’이 적혀 있습니다. 백제의 내관 12부 중 하나인 외경부에서 철대신 면 10량을 거두어들였다고 해석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4. ‘좌간대식기’가 쓰인 목간, 6~7세기, 부여 쌍북리, 5. ‘적미’가 쓰인 목간, 6~7세기, 부여 구아리>

4. ‘사람이름 + 빌린식량 + 상 + 미’가 반복됩니다. 빌려준 곡물과 돌려받은 곡물 그리고 아직 받지 못한 곡물의 양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외경부’ 목간과 함께 출토되어, 외경부의 공문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5. ’태공서미전부 적미이석’이 적혀 있습니다. 사람이름 + 부이름 + 곡물종류 + 수량 등을 적은 물품의 꼬리표 목간으로 추정됩니다. 적미는 특산품으로서 왕실에 헌상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세계유산 백제” 특별전, 2016년>

<2016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유산 백제”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웅진기 백제 이후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들과 유적들에 대한 압축적인 내용이었다.>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재)백제세계유산센터와 함께 백제(기원전18~기원후660)의 웅진도읍기(475~538)와 사비도읍기(538~660)에 해당하는 공주.부여.익산 등의 유적 여덟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리는 특별전 ‘세계유산 백제’를 개최합니다.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시민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정부가 애쓴 결과로서 당시 많은 분들이 기뻐했던 모습이 새롭습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며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문화적 교류와 독창적 문화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이해 천 수백 년 전의 백제 사람들이 이룩해 낸 개방적이며 창의적인 문화를 새삼 인식하면서, 이 특별전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문화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지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유네스코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웅진기 수도였던 공주,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 백제 무왕이 건설하고자 했던 새로운 수도 익산의 주요 유적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옛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는 8곳의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75년부터 660년까지 백제 후기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적들로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건축, 불교, 예술, 도시계획 원리 등 문화양식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 백제만의 세련된 문화를 꽃피우고, 이를 신라와 가야, 일본에 전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 번영에 크게 기여한 사실에 따른 것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백제의 역사
백제(百濟, 기원전 18 ~ 기원후 660년)는 기원 전후 무렵 한강 유역에 세운 백제국이 주변에 있던 마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면서 성장한 고대국가입니다. 475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재위 475~477년)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국방에 힘썼습니다. 그 뒤 동성왕(재위 475~501년)과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귀족 세력을 재편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중흥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성왕(재위 523~554년)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습니다. 사비도읍기는 백제문화의 절정기였기에 도성과 사찰, 능묘를 잘 꾸몄고, 백제를 돋보이게 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물품을 만들었습니다.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재위 641~660년)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했으며,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2. 중앙박물관
  3. 문화재청
  4. 두산백과
  5. 위키백과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