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성과 행정, 2. 건축, 3. 무기와 전쟁, 4. 일상생활, 5. 사찰과 불교문화, 6. 능묘, 7.국제교류, 8. 지방통치
백제 불교는 4세기 중국 남조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전래되면서 시작하였다. 웅진기 백제 때에는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국보),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상(국보)같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지만 공주에는 큰 사찰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백제 불교는 성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정림사를 세우면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이후 도성에는 왕흥사지, 능산리사지, 부소산성사지 등에 크고 작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무왕 때에는 익산지역에 미륵사, 제석사같은 사찰들이 도성 역할을 했던 왕궁리유적과 함께 세워졌다.
백제의 사찰은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금당식의 가림배치를 하고 있으며,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는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3탑 3금당식 공간배치를 보여준다. 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는 중국 남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으며 한반도와 일본의 건축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 불탑에 모셔졌던 사리구 등에서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치미, 7세기, 부여 부소산 사지. 치미는 불상을 모신 대형 불전이나 궁궐 전각을 장식한 대형기와로 당시 불교 건축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 건축에서는 치미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북경 자금성이나 일본 나라의 동대사에서 치미가 사용된 건축의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사찰
사찰은 백제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 염원이 담긴 공간입니다. 백제는 중국의 역사서에 ‘사찰과 불탑이 많은 나라’라고 기록될만큼 불교가 성행했던 나라입니다. 왕실은 주도적으로 사찰을 세웠고, 사리를 공양하는 등 불교의 적극적인 후원자였습니다. 왕흥사지와 미륵사지의 사리장엄국에는 언제, 누가, 무엇을 위해 발원하였는지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백제의 국교였던 불교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완성한 백제의 가람 배치와 불탑의 축조 방식은 주변 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는데 참여한 아비지(阿非知) 이야기나 일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 건립에 참여한 장인 집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풍탁은 절, 누각 등의 처마 끝에 다는 경쇠로서, 풍령 또는 풍경이라고도 합니다. 미륵사지 출토 금동풍탁은 종의 형태와 유사하며, 바람을 받아 소리를 내는 바람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백제 풍탁과 바람판은 익산과 부여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통일신라 풍탁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 중 녹색유리구슬, 유리판과 유사한 유리편과 가공품이 동원의 금당지와 목탑지, 그리고 공방지에서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공방지에서는 유리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도가니가 함께 출토되어 사찰 내에서도 유리를 자체적으로 제작했음을 알려줍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미륵사지에서만 확인되는 서까래 기와는 7개의 연꽃잎이 배치되고, 꽃잎 안에는 다섯 잎의 인동초로 장식되었습니다. 자방 한 가운데에는 서까래에 못으로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습니다. 막새 옆쪽의 테두리에는 톱니무늬를 두르고 둥근 점을 연속으로 배치했는데, 나무로 만든 바깥틀을 사용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수막새, 7세기, 미륵사지. 불교적인 의미를 갖는 연꽃문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의 기와이다. 백제는 웅진기에 중국 남조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사비기에는 여러 사찰의 건축과 함께 기와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양식도 다양해졌다. 기와 제작기술은 신라와 왜에도 전해졌는데, 왜에 파견된 와박사는 아스카 기와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미륵사지에서는 연꽃잎 안에 꽃술을 장식한 6엽의 수막새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부 수막새에는 주칠을 더해지지도 했으며, 건축물의 위상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8엽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지만, 시기적으로 빠른 고식으로 생각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보살상 파편, 7세기. 서역에서 전해진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상이다. 후대 불상과는 달리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미륵사지 중원 서회랑지의 동편 기단 밖 소토층에서 출토된 보살상은 미륵사 창건기 불교조각의 단면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상은 거푸집을 써서 성형한 소조상을 구워낸 이른바 전불(塼拂) 편으로, 아마도 공방에서 대량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전의 내벽을 장엄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사적 150호)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입니다. 이 사찰의 가람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 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로운 형식입니다. 돌로 만든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을 경계로 동원(東院), 서원(西院), 중원(中院)으로 구분됩니다. 지금은 서탑(국보 11호)만 남아 있는데, 목조 건축의 자재를 그대로 돌에 옮겨 놓은 모습입니다. 탑신 내부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는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의 발원문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금제 사리봉영기, 639년, 익산 미륵사지. 2009년 발견된 것으로 미륵사지 석탑 창건 내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沙澤)씨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唦)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덕적(沙澤德積)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제 사리 외호와 금제 사리 내호
사리공에서는 모두 18개의 금판이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3개의 금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하나에는 “중부의 덕솔 지애가 금 1량을 시주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리봉영기와 달리 아마도 사리를 봉안할 당시 급하게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글자의 내용은 백제의 행적구역(中部)와 관등(德率, 16품의 관등 중4품), 도량형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량의 무게는 13.2 g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사리공 바닥에 깔았던 유리판. 사리공 바닥의 너비에 정확히 맞도록 처음부터 주문 제작된 특수 유리판으로 추정된다.
3. 소조 나발, 4. 은제 손톱장식, 6. 은덩어리, 7. 은제 허리띠 꾸미개
진단구
미륵사지 석탑 사리용기가 안치된 심주로 가는 통로의 바닥석 아래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사찰 건물의 기단 등에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진압하기 위하여 기단 하부 축조시에 각종 물건을 공양하는 진단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소조 나발과 은제 손톱장식은 중국 남조 장간사 탑 사리 공양 중에 탑 아래에 매납했다는 불조발(佛爪髮), 즉 부처의 손톱과 머리카락 봉안 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청동합과 내부 공양품, 639년, 익산 미륵사지, 1. 청동합
3. 금구슬, 4. 금판, 5. 금못, 6. 곱은옥, 7. 호박구슬, 8.마노구슬, 9. 유리구슬, 10. 진주구슬
미륵사지 사리구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작업 도중 탑의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호를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사리호는 외호와 내호, 사리병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제 외호는 왕흥사의 은제 사리병과 닮아 백제 사리기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금제 내호는 외호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작고, 뚜껑과 항아리가 붙은 일체형입니다. 내호 안에 있던 사리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리로 만든 사리기이지만, 발견 당시 뚜껑을 제외하고는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사리공 안에서는 구슬, 장신구, 청동합과 같은 다양한 사리공양구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익산 왕궁리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 123호, 7세기 전반, 익산 왕궁리,
왕궁리 오층석탑의 1층 옥개석 동쪽 사리공에 금동 주칠 사리 외함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외함 안에는 금제 사리 내함이, 그 안에는 연화대좌 위에 놓인 유리 사리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함께 출토된 불상의 연대에 따라 9세기 말 ~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왕궁리 금제 사리 내함과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 외호의 세잎무늬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장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짧은 선이 채워진 연꽃무늬는 사비도읍기 백제의 국왕과 귀족들이 애용한 문양입니다. 또한 모두 사리를 담은 용기는 유리병을 사용하였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대관관사’ 글자를 찍은 수키와,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뚜껑접시의 바닥에 ‘미력사구’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미력사(彌力寺)’는 ‘미륵사(彌勒寺)’의 간자로 백제 토기에서 직접 사찰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구(几品)’ 작은 사발을 뜻하는 ‘구(甌)’의 약자로서, 당시 이런 형태의 그릇을 부르는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왕궁리유적(王宮里遺跡)
왕궁리 유적은 본래 도성으로 축조했으나 뒤에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유적 안에 있는 오층석탑(국보 289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사찰은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며, 발굴 조사로 현재의 석탑 자리에 원래 목탑이나 장방형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단부 심초석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을 근거로 통일신라 고려초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금당과 강당터에서 백제 수막새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왕궁사(王宮寺)’와 같은 글자가 찍힌 통일신라 기와가 발견되어 석탑을 처음 만든 시기는 백제이고, 통일신라 후기 어느 시점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보물 1767호, 577년 백제, 1. 청동제 사리합, 2. 은제 사리 외병, 3. 금제 사리 내병. 바깥쪽에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합, 금제 사리병이 있다. 동, 은, 금으로 만든 용기에 사리를 모시는 백제 사리장엄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사리합 바깥에는 6행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찰의 건립시기와 배경,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리장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리엄장구를 확인하는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목탑지 심초석의 사리공에 사리구를 넣고, 주칠로 연꽃넝쿨무늬를 그려 장식한 화강암제 뚜껑을 덮었습니다. 석제 장치 안에 청동합을 넣고, 다시 그 안에 은제 병, 그 안에 사리를 넣는 금제 병을 두었습니다. 석제 장치는 외함으로, 청동합은 내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동합 몸체에 5자 6행 29자가 음각되었습니다.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혹은 찰주)를 세웠다. 본래 사리가 두 매였는데, 묻을 떄에 신이하게 셋이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사리공양구, 1. 은제 허리띠 꾸미개, 2. 철제집게, 3. 성평 오수전, 중국 북제
사리공양구, 577년. 1. 금제 모자모양 꾸미개, 2. 금제 목걸이 꾸미개,
사리 공양구, 577년. 1. 옥벽 조각, 2. 호랑이 모양 장신구와 진묘수 모양 장신구, 3. 곱은옥
옥벽은 원래의 몸체에서 부채꼴 형태로 잘라낸 것을 다시 이등분하여 매납한 것입니다. 양면에는 음각으로 도철문 혹은 용문을 시문해 넣었습니다. 중국 한 무덤 출토품과 같은 형태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왕흥사지 치미는 동쪽 승방지로 판단되는 건물지의 남북 양끝에서 각 1점씩 출토되었습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한 후, 상.하로 나누어 가마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 건물에서 용마루 좌우의 치미 1벌(2점)이 함께 출토된 사례는 처음입니다. 남쪽 치미는 상부만, 북쪽 치미는 하부만 복원되었습니다. 치미의 추정 규모는 높이 123cm, 최대 너비 74 cm로, 중국 남조척(1자=24.5cm 전후)을 적용하면 5자 정도 높이에, 너비는 3자에 해당됩니다. 지붕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갗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최고 수준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찰의 중요 건축물에만 치미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알려진 사례와 달리,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방건물에까지 치미가 쓰였다는 점에서 당시 승려들의 높은 지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주목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수막새와 벽돌, 6세기 후반,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지 치미의 배 부분에는 톱니무늬를 바탕으로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흥사지에서는 동일한 형태의 연꽃무늬 벽돌과 수막새가 출토되었습니다. 같은 기와에서 찍어낸 치미에 부착했음이 분명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왕흥사지
왕흥사지(사적 427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창건(법왕 2년, 600)과 완공(무왕 35년, 634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왕흥(王興)’이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편이 발견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탑과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했으며, 사역(寺域)의 서쪽 경계에 배수로와 진입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목탑 터의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에서 청동, 금, 은으로 만든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청동 사리함에는 ’577년 2월 15일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리를 공양하고 절을 세웠다’는 글이 남아 있어,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초석 주변에 8,000점이 넘는 사리공양구가 있었는데, 이는 공주 무령왕릉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과 같은 시기의 고분 출토품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정지원이 만든 일광삼존불, 보물 196호, 백제 혹은 중국 남조, 6세기, 부여 부소산성
불상과 좌우의 보살상이 하나의 공배와 함께 주조된 이른바 일광삼존 형식의 불상으로, 대좌까지 모두 함께 주조되었습니다. 뒷면에는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해 금상을 공경되게 조성하오니,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하옵소서.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의 조각수법이 매우 간략하고 광배의 불꽃무늬와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정교함이 떨어져 백제 불상 특유의 온화하고 세련된 조형감은 부족합니다. 사비기 백제에서 정시나 조씨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아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진리와 지혜의 빛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이 광배는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어서 불상의 머리 뒤에 있는 촉과 연결하는 두광(頭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얇은 투조판과 금동판을 결합하고, 매우 정교한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뒷면에는 ‘하다의장이라는 승려)’여섯 글자를 새겼습니다. 최근에는 ‘하다의장이 불상을 만들다.)로 읽어 하다의장을 장인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습니다. 현제 전하는 백제 불상의 광배 중에는 가장 온전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백제 불교공예의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이 광배는 두광과 신광의 주변을 불꽃무늬로 장식한 배 모양의 거신(擧身) 광배입니다. 두광의 중앙은 연꽃잎으로 장식되었으며, 광배 주위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입체감을 더하였습니다. 광배 중앙에는 본존불과 결합시키기 위한 두 개의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 광배의 가장 큰 특징은 광배 외연에 부착된 사각형의 촉입니다. 삼국시대 금동광배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며, 중국 북위의 영향 혹은 백제와 북위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1. 연꽃무늬 수막새, 6세기 후반 ~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2. ‘자기사’가 쓰인 목간, ’보희사’가 쓰인 목간, 6세기 후반 ~ 7세기, 부여 능산리사지
‘자기사(子基寺)’ 명 목간은 상부에 V자형 홈이 파여 있는 전형적인 부찰(꼬리표)입니다. 자기사란 사찰명만 보이지만 부찰 목간인 것을 보면 자기사와 능산리절 사이에 물품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희사(寶喜寺)’명 목간은 앞면에는 지진 등 보희사의 승려로 보이는 인명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소금 1석을 보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앞면과 뒷면의 글씨 방향이 다르고, 묵서의 필체가 달라 시간적 차이를 두고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4. 소조상 편, 6세기 후반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5. 금동 풍탁 바람판, 6. 유리편, 6세기 후반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부소산 사지와 능산리 사지
부소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부소산 사지는 중문, 목탑, 금당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며, 강당이나 승방, 부속시설이 없어 순수하게 예불만 하는 사찰로 추정됩니다. 왕궁과 인접한데다 대형치미, 마루끝 장식, 허리띠 꾸미개 등이 출토되어 왕실과 직접 관련된 사찰로 보입니다.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사지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나, 강당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조상의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목탑지에서 출토된 석조사리감에는 위덕왕 13년(567)에 왕실이 발원한 사찰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공방 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는 동아시아 고대 금속공얘의 백미로 손꼽힙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두상이 훼손된 소조 인물상으로 중앙의 인물이 양팔을 벌리고 양 옆의 시종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복식과 자세가 당 염립본의 <왕회도> 및 공현석굴 등에서 보이는 황제행렬도나 예불도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정림사를 발원한 백제 성왕이 시종을 거느리고 예불행렬을 나선 모습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소형 소조상으로는 주로 두상이 출토되었습니다. 목의 아랫면에는 심목 구멍이 확인되어, 머리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서로 연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1979년 서회랑지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왼쪽의 협시보살은 천의자락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되고, 손에는 보주와 같은 지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양 또는 동위 양식에 가깝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정림사지의 서회랑지와 남회랑지가 접하는 지점의 기와 폐기구덩에서 200여 점의 소조상 파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봉보주보살상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에서 유행한 보살상으로, 중국 남조 양대와 일본의 아스카시대에 유행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중국청자, 6세기, 1. 청자연꽃무늬 단지편, 중국 남북조, 2. 청자뚜껑, 중국 남북조~수, 3. 청자단지편, 중국 남북조~당
삼국시대에 수입된 중국의 자기는 성곽과 제사유적, 사지, 그리고 왕이나 귀족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자기는 유적 편년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정림사지에서 수습된 청자연꽃무늬 단지편은 520년경으로 편년되는 중국 남경 대문산남조묘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여 정림사의 창건 시기를 가늠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전쟁에서 승리한 당나라 장군 소정방(592~667년)이 백제의 대표적인 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에 자신의 전공을 총 2,126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탑에 새겨진 명문에서 당 고종 현경5년(660) 8월15일에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웅진성에서 사로잡은 7월18일에서 멀지 않은 시점입니다. 한편 탑에 새겨진 대부분의 내용의 승자의 입장에서 왜곡되고 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멸망 당시 백제의 청치 상황과 지방지배 체제, 호구 등의 내용은 후대에 남겨진 문헌을 보충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정림사지
정림사지(사적 301호)는 사비도성의 중심지이자 왕궁의 남쪽에 세운 국가 사찰터입니다. 정림사는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달리 석탑을 이용해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였습니다.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했으며, 좌우에 회랑과 승방이 있었습니다. 석탑의 하부 기초는 판축토층으로 창건 당시에는 목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탑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소조상과 자기편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나타냅니다. 오층석탑(국보 9호)의 1층 탑신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 사찰은 ‘정림사(定林寺)’라는 명문이 찍힌 고려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정림사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