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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군수리사지(사적), 백제 칠지도가 출토되었던 절터.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군수리사지(사적)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인에 의해 백제 절터 중 최초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금당터는 백제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와를 쌓은 와적기단을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와 석조여래좌상(보물)가 출토되었으며, 칠지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금당터에서도 금동제방울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군수리사지는 사비도성 내에 있던 사찰이기는 하지만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백제 별궁이었던 궁남지(사적)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은 편이며, 목탑터에서 사리구는 발견되지 않고 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칠지도는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 칠지도와 그 형태가 비슷하여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부여 군수리사지(사적)>

사비기 백제 도성의 별궁이었던 궁남지 부근에 위치한 절터이다. 일제감점기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군수리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칠지도(복제)>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출토되었지만 지금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7개의 가지가 있는 칼인 칠지도는 389년에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전해진 칼이다.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한 백제가 왜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선물로 준 듯하다. 일본에서는 보물로 간직되어 천리시 석상신궁에 보존되고 있다.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당시 백제가 제철기술, 금속공예 기술뿐만 아니라 문자를 외교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한국고대문자전, 중앙박물관, 2011년)

<군수리사지 가람배치도>

남북으로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양쪽에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다.

<절터 입구>

<목탑터>

심초석  근처에서 2점의 불상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왕흥리사지와는 달리 사리구는 출토되지 않았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 백제 6세기>

부여 궁남지 부근에 위치한 군수리사지에서 목탑 심초석에서 출토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교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1936년 부여 군수리 절터의 목탑 자리에서 보살상, 광배파편, 각종 옥, 토기편과 함께 발굴된 백제 불상이다. 탑을 세우거나 사리기를 넣을 때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는 백제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돋보이며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주름선도 자연스럽다. <출처: 중앙박물관>

<목탑터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보물)>

<목탑터 뒷편 금당터>

백제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기단인 와적기단이 사용되었다.

<군수리사지 금당터에서 확인된 와적기단 형태>

<건물터>

절터 좌.우에는 회랑터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으며, 강당지 양쪽에 작은 건물터가 있다.

<호자>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호랑이모양의 남자용 요강인 호자이다.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호자는 어디에 쓰였을까?
호자는 중국 남조 문물의 영향을 받은 호랑이 모양의 남성용 요강이다.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상체를 들어 얼굴을 왼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등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는 황제가 행차할 때 시중을 드는 하인이 호자를 들고 뒤따랐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부여박물관, 2012년)

부여 군수리사지, 사적,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이곳은 유래가 알려지지 않은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절터로 2차례 발굴.조사가 있었다.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남쪽으로부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하였다. 강당 양쪽에는 사각형의 조그마한 건물터가 있었는데 종루와 경루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탑터의 흔적으로 보아 목탑으로 보인다. 금당 좌우에는 중심부를 둘러싼 회랑터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금당과 강당의 기단은 기와 조각을 옆으로 뉘어 쌓은 와적기단인데 이것은 백제 건물터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건축기법이다. 유적의 목탑터에서 석조여래불상과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