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사지(사적), 백제 성왕을 위해 세운 사찰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능산리사지(사적)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능산리고분군과 백제 수도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던 부여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이니 백제의 1탑1금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절터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함(국보288호)를 비롯하여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류,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재인 수막새와 암막새, 벼루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세워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원 원찰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목탑터 심초석에서 출토된 사리감에는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는 내용의 글씨가 적혀 있다. 창왕은 백제 27대 위덕왕을 일컫는 명칭이며, 그의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이 사찰을 창건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제사를 올리던 사당과 강당건물이 먼저 들어섰고, 뒤에 목탑 등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찰의 규모는 익산 미륵사지에 비해 작지만 왕릉을 지키는 원찰의 의미를 갖는 사찰이었다.

SANYO DIGITAL CAMERA부여 능산리사지(사적  434호, 2010년 모습).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의 골짜기를 메워서 사찰을 조성했다.  원래 계단식 논이 있던 곳이었는데 모형관 공사중 유물의 일부 출토되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능산리 절은 언제 세워졌을까?
능산리 절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사비천도라는 도성 전체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538년 이전이 이미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으나, 5~7차 발굴과정에서 그 실마리를 제공할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능산리 절의 대지조성을 확인하기 위한 트렌치 조사나 중문지 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 등지에서 인물무늬 청자편, 흑갈유 벼루 다리편, 청자 잔편과 같은 6세기 중엽대의 중국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최하층에서 출토된 삼족토기, 개배 등을 통해 6세기 중엽에 능산리 절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능산리사지. 원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터를 기준으로 복원해 놓았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백제의 1탑1금당식 사찰의 모습을 실제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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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사지 건물 배치도.

SANYO DIGITAL CAMERA목탑터와 금당터.

능산리 절은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
능산리 절은 중문-탑-금당-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가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회랑 북쪽에 강당과 연결된 건물이 세워진 점인데 불구를 제작하던 공방으로 밝혀졌다. 절의 둘레에는 경내로 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자형의 배수로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능산리 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배수로 서쪽에는 기와를 구워 공급하던 가마가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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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목탑. 건물터의 규모나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을 고려하여 5층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재현해 놓았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에 비해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삼국시대 이후 세워진 전형적인 목탑의 형태나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도 비슷한 목탑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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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 심초석 위에서 출토된 사리감(국보 288호). 이 사리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공양구로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백제 창왕명석조 사리감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아래가 편평하고 위가 둥근 아치형으로 무덤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앞면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년)에 누이인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고 한자로 적혀 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로 백제의 왕릉이 있는 능산리에 절을 세워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불교를 통해 성왕이 이루지 못한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 사리감은 위덕왕의 이러한 간절한 염원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심초석 부근에서 출토된 장신구들. 불상, 금공예품,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들이 같이 출토되었다. 당시 인두, 중국 등에서 확인되는 초기의 사리공양 모습과 유사하며, 우리나라 사리공양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소조불상편, 서역의 영향을 받은 초기 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제에서 처음 바쳐진 사리공양
목탑지 심초석 주변에서는 사리감과 함께 불상, 금공품,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신구로 목탑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과 받침돌을 놓을 때 함께 바쳐진 사리공양구이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 중국 등지에서 확인되는 초기 사리 공양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더불어 한국 사리장엄의 역사가 백제 위덕왕이 567년에 세운 능산리 절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금당.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삼국시대 금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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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 향로는 구성은 용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 연꽃잎을 형상화한 몸통과 신선이 사는 박산을 표현한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SANYO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는 강당건물과 공방, 사당, 승방 등이 있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강당.  일반적인 사찰의 강당과는 달리 사당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편에는 신좌로 추정되는 큰 받침돌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초석이 없는 통간으로 트여 있다.

능산리절 강당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보통 절의 강당은 강론이나 설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전체가 트여 있는 긴 통칸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능산리 절은 강당지를 중심으로 공방 1,2, 불명건물지 1,2의 초기 건물지군이 ‘∩’자형으로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지 내부는 퇴칸을 갖추고 2실로 분리되어 있다. 서실은 중앙에 신좌로 추정되는 큰 받침돌이 있으며, 동실은 내부에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트여 있다. 이 건물들은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해 제사를 담당하던 ‘사당’으로 추정되며, 567년 목탑이 건립됨에 따라 불교 사찰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지만 일정기간 기존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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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모양 토기, 능산리 절터. 공방지 건물에서 청동제품을 제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공방지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공방지 1, 2는 원래 초기 건물지군으로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사당’으로서 각종 제사 기능을 수행하던 시설이었다. 공방지 2는 강당지와 같은 구조로 제사기능이 수행된 공간이었고, 공방지1은 강당 부속건물의 성격으로 공식적인 접견이나 의례준비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무왕 재위기간 중 익산 천도와 연계되어 상당히 위축되면서 공방지로 전환되게 되었다. 내부구조도 기존의 벽체 하부시설을 훼손하고 굴뚝을 설치하는 등 인위적으로 변형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청동제품 등을 제조하는 공방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들. 능산리사지가 건립된 6세기 전반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사 만들어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절이 여러시기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제사를 담당하던 강당주변부터 시작하여, 목탑과 금당이 세워지고 주변건물이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꽃무늬 수막새, 외곽사역 능산리절은 어떻게 완성되어 갔을까?
고대 불교 가람의 일반적인 건립과정은 목탑이나 금당이 먼저 만들어지고 중문과 회랑이 축조되며 마지막에 강당이 세워진다. 이에 반해 능산리 절은 초기에 만들어진 건물지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반 가람의 건립순서와는 차이를 보인다. 1단계는 강당지와 공방지 1,2, 불명건물지 1,2가 건립되는 시기로 6세기 중반부터 567년 목탑 건립 이전까지이다. 2단계는 목탑의 심초석 매립을 기준으로 목탑, 금당, 중문, 회랑이 차례로 건립되어 본격적인 불교사원으로 기능하는 시기이다. 3단계는 가람 중심부의 주요 건물 보수가 이루어지고, 강당지 북쪽과 서회랑지 서쪽 일대에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건립된 6세기 후반에서 백제 멸망기까지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보희사’명 복간(복제품), 물품이동(꼬리표) 목간,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

목간이 들려주는 능산리 절 이야기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주로 중문지 남서쪽과 동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이 목간의 대부분은 554년 관산성 전투 무렵부터 목탑이 건립된 567년 전후의 시기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목간 1점이 8차조사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가 폐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에 남겨둔 목간들은 내용에 따라서 불교의례.제의.주술, 물품의 이동, 문서행위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남근형목간.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했던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에 보이는 길가에 세운다는 뜻의 ‘도연립’은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이본의 도향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근숭배사상은 생산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서 남근의 왕성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관산성 전투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성왕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취약했던 위덕왕 정권에 대한 백제의 중흥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나막신(복제품). 절터에서는 다양한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들에서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 목제품 이야기
목간이 출토된 곳에서 다양한 목제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접시, 빗, 구유통, 나막신, 자, 칼, 새모양 목제품, 숟가락, 젓가락, 지게발채, 수레바퀴편 등이 함께 나왔다. 다양한 생활용품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색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칠기편이다. 남아 있는 칠기편의 형태로 보아 대접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옻칠한 무늬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칠기편은 고대 칠기 제작방법이나 백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금구슬, 금제 원추모양 장식, 부여 능산리 절터

진흙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금속공예품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금속공예품을 통해 백제의 금속 주조 및 세공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금동과 은 판불은 백제 금속공예품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타출기법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금동 판불에는 삼존불이 표현되어 있다. 누금구슬과 원추형 누금장식은 금알갱이들을 접합하고, 부분적으로 구멍을 뚫어 가는 금실로 테두리를 장식하여 매우 세련된 금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모자방울 또한 백제의 독특한 금속공예품으로 방울 몸통에 작은 방울을 사방에 매달았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무늬 청자, 부여 능산리 절터, 중국 남북조.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중국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절을 통해 본 백제의 국제성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국제적 성격의 유물은 사비시기의 대외교류 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로는 수당대의 흑갈유 벼루 다리편.흑갈유 자기편.개원통보가 있고 남조시기의 호자나 북위 양식인 소조상과 토제장식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모방품으로는 녹유자기나 칠토기를 들 수 있다.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풍경판, 연통형 토기, 표면을 단단한 도구로 눌러 시문한 암문토기가 해당된다. 이밖에도 갈색의 나뭇결 무늬가 있는 유리와 파란색 유리편은 서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항아리. 절터에서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능산리 절터 토기 이야기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기종별로 항아리, 사발, 등잔, 자배기, 전달린토기, 벼루, 연통형토기, 접시, 뚜껑, 병, 삼족토기, 기대, 시루 등이 있다. 항아리는 짧은목항아리가 대부분이며, 사발은 표면에 흑색칠을 입힌 것이 많다. 벼루는 다리형태가 받침모양인 것과 다리모양인 것이 모두 확인된다. 뚜껑은 형태가 몹시 다양하다. 등잔은 대부분 심지받침이 없으며, 사슴기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토기 표면에 글씨나 부호를 새긴 것도 관찰된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567년 하한인 사비 전기의 최하층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편년된다. (부여박물관, 2012년)

SANYO DIGITAL CAMERA 부여 능산리고분군(사적 14호).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자들에 의헤 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1965년에 다시 2기의 고분이 발견되어 총 8기의 고분이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434호)는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사적 58호)과 능산리고분군(사적14호) 사이에 형성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이다. 목탑터는 이중기단으로 남쪽과 북쪽에 계단시설이 있다. 중심부의 심초석 위에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되어 절의 축조연대 및 발원자를 알게 되었다. 금당터는 목탑터와 마차가지로 이중기단이며,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다. 강당터는 기단의 길이가 37 m나 되는 거대한 집으로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쪽방에는 온돌시설이 있는데, 고구려시대에 속하는 만주 집안의 댕대자유적과 흡사하여 양지역간의 문화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절터는 유존상태가 양호하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고대 건축사 연구에 획적인 자료이다. 이 능산리사지는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감의 명문에서와 같이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위덕왕이 창건하였으며 660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허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국립부여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