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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백제문화단지, 능산리사지 사찰을 재현한 능사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능사(陵寺)이다. 능사는 능산리 절터(사적)에 있던 사찰을 건물터를 기준으로 원래의 사찰과 거의 1:1로 재현해 놓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원래 것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출토된 탑이나 남아 있는 석탑, 일본 사찰에 남아 있는 백제의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재현하고 있다. 사찰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목탑과 금당이 일렬로 배치된 1탑1금당식 백제 사찰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체험공간이 되고 있다. 옆에 있는 관북리 유적 건물터 등을 참조하여 옛모습을 상상하여 재현한 백제왕궁과는 달리 능사는 원래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능산리사지(사적)는 능산리고분군과 백제 수도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던 부여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이니 백제의 1탑1금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절터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함(국보)를 비롯하여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류,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재인 수막새와 암막새, 벼루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능사(재현)>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절터를 기준으로 재현해 놓은 능사. 삼국시대 백제 사찰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사찰로 능산리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 건물배치도>

이곳에 재현해 놓은 능사는 이 사찰 건물터와 거의 1:1로 복원해 놓고 있다.

능사(陵寺)
능사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백제 왕실의 사찰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유적의 원형과 같이 1:1로 이곳에 재현하여 건물 사이의 간경,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 등을 동일하게 하였다. 능사의 재현을 위하여 부여읍 동남리에서 출토된 금동탑편의 하앙양식과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익산미륵사지 석탑 등을 참고하였다. 능사의 가람배치는 백제시대 대표적 배치로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능사(재현)>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사찰입구에서 5층목탑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능사 앞에 재현해 놓은 연못>

백제 절터에 주로 볼 수 있는 연못의 형태이다.

<출입문 앞에서 본 능사>

목탑의 웅장함이 돋보인다. 궁궐처럼 출입문 양쪽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통문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있는 능사 중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사찰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역사가 출입문 양쪽에 세워져 있다. 이후의 사찰들과는 달리 금강역사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다.

<중문 양쪽 회랑>


<능사 오층목탑>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목탑터의 규모 등을 고려해 볼 때 오층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앞.뒤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건물의 지붕을 바치는 공포, 주심포 계열의 방식으로 주심포 하앙식방식이라고 하며, 일본 호류사의 양식을 참조하였다고 한다.

<중문에서 본 목탑 1층>

중문을 들어서면 5층목탑이 보이는데, 앞면 3칸으로 멀리서는 보는 목탑의 웅장함보다는 건물이 작다는 느낌을 준다. 삼국시대에는 오늘날 불교와는 달리 신앙의 중심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목탑이 중심이었는데, 이 곳 능사도 목탑이 사찰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준다. 목탑은 사람이 들어가서 활동하는 건물이라기 보다는 사리를 모시는 탑의 성격이 강한 건물이다.


<내부>

내부에는 용무늬를 그려놓은 굵은 기둥인 심주를 볼 수 있다. 심주의 초석인 심초석 아래에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한 사리함을 묻어둔다.


<목탑 심초석 부근에서 출토된 석조사리감(국보)>

이 사리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공양구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사를 창건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567년 백제 창왕 대 세운 목탑을 재현한 곳이다. 능사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백제 왕실의 사찰로, 부여 동남리에서 출토된 금동탑편과 일본 호류지 오층 목탑에 보이는 하앙식 구조로 재현하였다. 화강석 가구식 이중기단에 5층 건물과 상륜부로 이루진 이 목탑의 높이는 건물 29 m, 상륜부 9 m, 전체 38 m에 이른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불상을 모시는 금당>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만든것으로 보인다.

<금당 내부>

서산마애삼존불상처럼 동시대에 유행했던 삼존불상을 재현해 놓고 있다. 목재로 조각한 목조불상으로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입상이 세워져 있다. 불단 앞에는 공양구로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놓여져 있다.

여래좌상(Seated Buddha)은 통통한 얼굴에 긴장이 풀린 자연스러운 자세, 대좌 밑으로 부드럽게 늘어진 옷주름, 선정인의 손 모습은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납석조여래좌상에서 보이는 백제불상의 특징이다. 보살입상(좌)은 미소진 부드러운 얼굴표정, 세 갈래로 갈라진 머리장식, 밑이 뾰족한 넓적한 목걸이, 어깨에 고정한 둥근 장식과 무릎부분에서 교차된 천의 그리고 시무외인.여원인의 손모습이 특징이다. 6세기에 유행한 백제 보살상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군수리 절터 출토 금동보살입상에서 볼 수 있다. 보살입상(우)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아래, 위로 하여 둥근 보주를 마주잡은 보살상으로 서산마애삼존불에서도 볼 수 있다. 삼국 중에서는 백제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며 중국의 남조, 일본 비조시대에서도 제작되어 당시 문화의 유입경로를 유추할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향로는 구성은 용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 연꽃잎을 형상화한 몸통과 신선이 사는 박산을 표현한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금동대향로. 금동대향로는 능산리 절터 서쪽의 한 구덩에서 발견되었다. 향로는 용모양의 하단과 몸체, 뚜껑 등 3부분이 주물로 제작되었다. 국보 287호로 높이 64cm, 무게 11.8kg이나 되는 대형 향로이다. 중국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받침, 몸통, 뚜껑 등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연꽃무늬와 신선 등을 새겨 넣어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백제인의 이상적 세계를 반영한 걸작이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금당 뒷편 강당>

앞면 8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자효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반사찰의 강당과는 달리 성왕을 위한 사당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편 부용각이라는 건물>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다른 부속건물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일반사찰의 강당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건물>

공방 건물을 재현해 놓고 있다.

<공방 내부>

<공방 옆 창고처럼 생긴 건물>

<공방 뒤 창고처럼 생긴 건물>

<옆에서 본 능사>

<출처>

  1. 백제문화단지
  2. 국립부여박물관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