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백제 귀족의 대저택이다. 백제말기에 대좌평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의 집을 재현하였다. 백제말 대좌평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은 사비기 백제의 중요 귀족가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당시 주택에 대한 자료는 부여 관북리유적의 건물터 등을 발굴.조사하기는 했지만 문헌자료나 출토유물 등이 거의 없어 사실상 당시 모습을 상상하여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집은 실제 발굴된 집터를 기준으로 재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한말 대지주들의 저택은 99칸 한옥을 연상시키는 건물규모와 배치를 하고 있다. 솟을대문은 없지만 정문과 중문으로 된 2개의 출입문을 두고 있으며, 중앙에 사랑채에 해당하는 팔작지붕을 한 큰 건물 2동을 배치하였고, 중문 오른편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을, 왼편에 안주인의 거처를 두고 노비들의 거처를 배치해 두고 있다.
사비기 백제 귀족층의 대저택을 재현해 놓은 사택지적의 집. 궁궐과 비슷한 공간 배치로 중앙에 관청건물과 비슷한 형태의 큰 건물 2동이 배치되어 있으며, 양쪽에 생활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귀족주택(사택지적의 집)
백제 귀족의 주택으로 백제말기에 대좌평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의 가옥을 재현한 곳이다. 대좌평은 제1의 관등인 좌평 중 최고에 해당하여 여덟개의 큰 귀족가문 가운데에서도 사(택)씨가 최고였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출입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있고 양쪽에 부속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건물 2동이 들어서 있다. 관료제가 정착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집주인이 손님을 맞거나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관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우재라 이름붙여진 이 건물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을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이다. 내부는 궁궐건물 처럼 방을 구분하지 않고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 이 저택 주인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은 앞면 7칸 규모로 통로 역할을 하는 툇간을 두고 있다.
오른쪽 공간에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보이는 2동이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각 건물에는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 재현해 놓은 백제 귀족 남자의 일상 생활 모습.
건물 앞 마당 한쪽편에는 식솔들이 머무는 공간과 창고 등이 있다.
오른쪽에는 안주인이 생활하는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건물은 방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 한쪽편에 식솔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
<출처>
- 백제문화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