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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의 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사적)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이다.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4.55 m의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리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 머리는 얼굴 일부가 깨져 있는데, 머리 위에 둥근 뿔이 있고, 입은 불을 내뿜으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거북 등에는 육각무늬를 세웠으며, 움직이려는 네 발은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뒤엉킨 모양을 입체감 있게 조각했다.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도 웅장하면서 화려한 조각수법 등의 돋보이는 걸작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탑비 중에서는 가장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한다.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세웠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당대 최고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문 내용 중 낭혜화상의 신분과 관련된 용어들이 적혀 있어 신라 골품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혜는 국왕이 내린 시호이고, 탑 이름은 ‘백월보광’이라고 한다.

<낭혜화상탑비(국보)>

충남 보령시 성주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지 옛 절터 뒷편에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이다.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고 있다. 통일신라말 진성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승려의 탑비로는 그 제작연대가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거북받침돌>

얼굴은 용이 불을 뿜을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거북 다리>

땅을 받치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거북 등>

육각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머릿돌>

구름사이로 용이 다투는 모습을 입체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뒷편에서 본 머릿돌>

<비몸에 새긴 글씨>

최치원이 글을 지은 4개의 비석 중 하나로 글씨는 최인연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업적을 적고 있는데, 통일신라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강 탑비 탁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탁본첩>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국보,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신라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산문을 처음으로 창설한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 일부가 손상되었을 뿐 비신과 머리돌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낭혜화상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낭혜는 그가 죽은 후 내려진 시호이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습득하고 20여년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 “동방대보살”이라 일컬었다. 847년에 귀국하여 40여년간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불법을 크게 떨쳐 성주산문을 일으켰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낭혜 화상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890년(진성여왕 2년)으로 짐작된다. (보령시, 2010년)

성주사(聖住寺)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충남 보령시에서 공주, 부여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평지사찰로 금당 뒷편에 3기의 삼층석탑, 앞편에는 오층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삼층석탑은 다른 곳에서 옮겨 왔기 떄문에 금당 뒷편에 2개의 탑이 세워 별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 했던 기존 불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시여기는 선종계열 불교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 글을 지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가 절터에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지(사적)>

통일신라말 크게 번창한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큰 절터이다. 이곳에는 낭혜화상탑비(국보)를 비롯하여 4기의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보령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