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위치한 무량사이다. 이 사찰은 통일산라말 범일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오층석탑을 계층하여 고려초에 조성한 오층석탑(보물185호)와 석등(보물 233호)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전기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내에는 주불전인 극락전(보물 356호)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불전과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을 주불전으로 해서 여러동의 작은 불전들이 있다. 특히 극락전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금산사 미륵전과 함께 삼국시대와 삼국시대 금당인 장륙전의 형태가 잘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건축물이다.
부여 무량사는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인 인근 성주사에 비해 규모가 적었지만 조선후기 이후 지역의 중심사찰로 자리잡고 있다. 무량사가 많은 널리 알려지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크게 중창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전기 천재이자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이 곳에 머물렀던 흔적으로는 영각에 모셔진 김시습 초상화(보물 1479호)와 그의 승탑일 것이다. 김시습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승탑 앞에는 지금도 막걸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볼 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척을 찾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여 무량사. 매월당 김시습이 만년을 보낸 사찰로 임진왜란 이후 크게 중건하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삼국시대 금당의 모습이 남아 있는 극락전과 백제 석탑 양식을 계승한 오층석탑이 인상적인 곳이다.
무량사 들어가는 길
무량사는 부여군과 보령시를 연결하는 교통로(40번국도)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 중심사찰이었던 성주사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부여에서 자동차로 30여분을 달리면 외산면사무소가 있고 그곳에서 5분 정도 들어가면 무량사 입구에 도착한다. 무량사 마을을 지나면 일주문을 나타나고, 일주문을 지나서 개울을 건너면 호젓한 산사의 느낌을 주는 길이 나타난다. 사찰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숲이 우거진 곳에 있어 조용한 산사의 분위를 만끽할 수 있다.
개울을 건너 사찰로 들어가는 언덕길. 다리에서 사찰까지는 50 m도 안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호젓한 느낌을 주는 기분 좋은 길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무량사 모습. 주불전을 중심으로 넓은 마당과 함께 웅장해 보이는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사찰 규모가 크지 않고,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이 아니라서 승방을 비롯하여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요사채를 많이 두고 있지는 않으며, 강당도 없다.
극락전과 오층석탑
경내 중심 영역은 주불전인 극락전(보물 356호)과 오층석탑(보물 185호), 석등(보물 233호)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시는 오층석탑은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석등 또한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우수하다. 부여 정림사를 연상시키는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356호). 2층 건물로 삼국시대 장륙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보시고 있다고 한다.
오층석탑과 석등.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탑신을 올려놓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은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 몸돌은 지붕돌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는 비례가 적절하여 안정적이며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석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량사의 불전과 요사채
무량사는 극락전 외 여러 불전들을 두고 있는 그 중 명부전은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국내 사찰 명부전 역사가 깊은 편에 속한다. 경내 서쪽 언덕에는 약간의 내력이 있어 보이는 영산전, 김시습 초상화를 모신 영정각, 최근에 신축한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 토속신을 모신 삼성각을 두고 있다.
극락전 옆에 있는 명부전.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한 명부전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명부전 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부여 무량사 명부전
무량사 명부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낮은 자연석 기단으로 조성하고, 기둥이 놓이는 주좌면을 살짝 가공한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건물 전면은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웠다. 정면부 각 칸에는 두짝으로 이루어진 세살 청판문을 달았으며, 후면은 판장벽으로 마감하였다. 지붕 좌우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비바람을 막도록 하였다. 19세기 사찰건축물로서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익공과 단청 등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사찰 서쪽편 경사진 언덕에는 영산전을 비롯하여 여러동의 불전들이 세워져 있다.
영산전 안쪽으로는 무량사를 대표하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영정각이 있다.
영정각에 모셔진 김시습 초상화(보물 1479호). 진품은 아닌듯 하다.(?)
김시습초상, 보물1479호
“김시습초상”은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밀화영의 끈이 달린 평량자형의 입을 쓰고 옅은 살구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은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라”고 묘사했던 서유영의 배관기와 상통하는데, 눈의 총기가 생생하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라는 인물사적 가치 위에 조선시대 야복초상화의 가작이란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원통전. 관음보살을 모시는 불전이다.
안쪽으로는 손님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이는 작은 요사채와 삼성각이 있다.
토속신을 모시는 삼성각.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의 기능이 합쳐진 불전이다.
요사채, 승려들의 수행공간
무량사는 주불전인 극락전은 규모가 큰데 비해 이곳을 찾는 신도가 많지 않고, 상주하는 스님들 또한 적어서 그러지 수행공간인 요사채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는 무량사가 수행 도량으로서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만수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머물기를 원하는 신도도 많지 않음을 보여 준다. 불교에서 차지하는 무량사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주불전 옆에 있는 요사채 건물. 우화궁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앞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로 마루 앞에 유리문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사찰 건물의 영향을 받은 건물 형태이다.
앞쪽에 있는 전형적인 요사채 건물.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 승탑
무량사 입구 마을에서 서쪽편 언덕에는 여러기의 승탑들이 모여 있는 부도군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규모가 크게 눈에 띄는 것이 매월당 김시습의 승탑이다. 승탑은 목조건물 형태인 기단,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부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기단에 용을 새겨 놓고 있다. 지금도 그의 승탑 앞에 그를 위해서 막걸리 1통과 과일이 놓여져 있어서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