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맹씨 행단(사적)이다. 맹씨행단은 조선초 세종때 청백리로 잘 알려진 맹사성 일가가 살던 고택과 그가 심은 수령 600년 이상된 은행나무를 말한다. 고택은 1330년에 최영 장군 부친이 처음 지었으며, 최영 장군도 살았던 곳이라 전해진다. 고려말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죽은 후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맹씨 일가가 이 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工”자형 평면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이 고택은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시의 건축양식과 한옥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아산 맹씨행단이라는 이름때문에 아산 맹씨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안내표지판에 자신들은 신창맹씨임을 강조하고 하고 있다. 마당에 있는 수령 600년이 넘은 2그루의 은행나무는 맹사성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나무 아래서 맹사성 선생이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강학을 논의하던 자리라고 해서 맹씨 행단이라고 불린다. 고택 뒷편 약간 떨어진 곳에는 조선 세종때 정승이었던 맹사성, 황희, 권진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과 정자인 구괴정이 있다.
아산 맹씨 행단(사적 109호). 조선초 세종때 정승을 지낸 청백리 맹사성 일가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말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고택과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2그루가 남아 있다.
고택은 “工”자형 평면 배치를 하고 있으며 고려말.조선초 건축 양식이 많이 남아 있어 한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고택 내부. 문틀을 두껍게 만들고, 출입문을 작게 만드는 등 당시의 건축 양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붕의 받치는 공포에서 당시 많이 사용되었던 주심포 양식을 볼 수 있다.
고택 앞 마당에는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 년이 넘은 은행나무 2그루가 남아 있다. 이곳에 은행나무가 있으며 ‘행단’이라 부른다. ‘행단’은 공자가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유래한 말로 글을 가리치고 공부하던 자리를 의미한다.
은행나무는 200~300여 년전에 옆에 작은 가지가 자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가운데 있는 원래 나무는 거의 살아 있지 않다.
맹사성이 은행나무를 심을 때 쌓았다는 축대가 전해 온다.
보호수
이 나무는 1982년 11월 1일에 우리도 나무로 지정된 쌍행수(雙杏樹)로서 640여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행수 한 그루는 높이 40 m, 둘레 5 m 80 cm, 다른 한 그루는 높이 45 m, 둘레 8 m 50 cm로, 사적 109호로 지정된 아산 맹씨 행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으로 봉직하고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1340여 년경에 심은 것이다. 당시 맹사성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 곳을 행단이라 칭하였다 한다. 한편 이 나무는 2~300여 년 전부터 싹이 원목 옆 사방으로 자라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 것이며 1987년 원목의 구멍 안이 부패하여 외과 수술을 받았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건물은 앞면 3칸 규모이며 맹유, 맹희도, 맹사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물 형태로 볼 때 조선중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최근에 크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세덕사
세덕사는 두문동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조선조의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맹유는 고려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閒民)으로서 충절을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고택 아래에 있는 문간채. 솟을대문과 작은 문간방들이 있는 건물이다. 구한말에 지어진 고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문간채 안쪽에 있는 살림집. 원래 행랑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택 뒷편 200여 m 떨어진 곳에는 맹사성을 비롯한 세명의 정승이 쉬었다는 구괴정과 그들이 심었던 느티나무가 남아 있다.
구괴정 정자와 그 앞에 심어져 있는 수령 600여 년이 넘은 느티나무. 당시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
구괴정
이 정각은 조선 세종 때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타무를 세 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구괴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600여 년 전의 이곳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북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도 살폈다. 6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 그루 중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화하였던 5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들판. 마을 앞을 배방산이 막아주고 있으며, 광덕산을 거쳐 공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지나고 있다. 깊은 산이 있어 물이 풍부하여 농사 짓기에 좋은 자연환경이다.
맹씨 행단이 있는 마을입구. 신창 맹씨 세거지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표지석과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마을입구에서 맹씨 행단으로 들어오른 길. 다른 고택들과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맹씨 행단 입구.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목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아산 맹씨 행단, 사적 109호,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조선초기
맹씨 행단은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1360~1438년)의 집안이 살던 곳으로 지역 안에는 고택과 세덕사, 구괴정,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자형 집이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홑처마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민가이다. 세덕사(世德祠)에는 고려말 두문동 72현인 맹유.맹희도.맹사성의 위채가 있다. 구괴정(九槐亭)에는 세종때 황희.맹사성.권진 등 3정승이 9그루의 느티나무(槐木)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2그루만이 남아 있다.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杏壇)’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행단’은 후학에게 글을 가리치고 공부하던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출처>
- 아산시청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