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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추사고택, 궁궐 한옥 양식이 있는 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김정희 선생 고택이다. 증조부인 김한신이 원래 서울 통의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53칸 규모였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있다. 건물은 사랑채가 동쪽에, 안채가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김정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해시계 역할을 했다는 작은 돌기둥이 놓여져 있다. 안채는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출입문은 사랑채가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에는 상당히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 부엌, 광 등이 있다. 안채 부엌은 요리를 하는 공간이 아닌 난방만을 위한 용도인 것이 특징이다. 이는 안주인이었던 화옹옹주의 신분을 고려하여 궁궐에서 사용했던 한옥의 형식을 적용했기때문이라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는 구한말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청나라를 방문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난 이후 일생을 그들과 교류하였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밝았으며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문인화와 서예에 매우 뛰어났으며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그의 글씨와 그림은 당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

53칸 규모였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있다.건물은 남향을 하고 있으며 지대가 낮은 동쪽에 사랑채를, 높는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였다.

김정희 선생 고택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그 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저택 출입문인 문간채>

구한말 권문세가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을 하고 있다.

<안쪽에서 본 솟을대문>

<동쪽에 위치한 사랑채>

‘ㄱ’ 형태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건물 앞쪽에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집주인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동쪽편 두칸짜리 온돌방 내부.>

<사랑채 댓돌 앞 석년(石年)이란 글자가 새겨진 돌기둥>

추사가 해시계 용도로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남쪽 온돌방과 대청마루>

남쪽편에 1칸짜리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뒤에서 본 사랑채>

사랑채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 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열개 문으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이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 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식구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영남 북부 내륙지방에서 볼 수 있는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나 연경당과 같이 궁궐내 한옥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왕실가족이었던 화순옹주를 고려하여 궁궐내 한옥형식으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동쪽편에 주 출입문을 두고 마당이 있는 남쪽에도 출입문이 있다.

<안채 출입문>

정면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보인다.

<안쪽에서 본 출입문>

양쪽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마루방이 있다.

<안채>

안채는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생활하는 온돌방 등이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대청마루 내부>

6칸 규모의 상당히 큰 규모의 대청마루이다.

<대청마루 양쪽에 위치한 온돌방>

<아궁이>

이 저택 안채에는 궁궐 한옥의 형식을 적용하여 부엌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있으며, 난방을 위한 온돌 아궁이만 있다.

<마당으로 연결되는 동쪽 출입문>

<뒤에서 본 안채>

안채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안채 뒷편에 위치한 영당>

추사가 죽은후 그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영당 내부>

현재 그의 초상화는 중앙박물관에, 현판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영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을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한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추사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 우물>

우물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우물에는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고택 뒷편에 위치한 그의 무덤>

김정희 묘
김정희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 세 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에 후손인 김승렬이 짓고 새겼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 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을 쓴 것이 죽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고, 제자들이 다투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문을 바쳤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바깥에서 본 추사 고택>

김정희 선생 유적
추가 김정희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어려서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치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24세인 순조9년(1809)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한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완성해 나갔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다. 55세 때엔 헌종 6년(1840)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헌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 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열녀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의 유적이 있어 그의 자취와 숨결의 느낄 수 있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출처>

  1. 예산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