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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울산시 중구 북정동 옛 울산도호부 관아 뒷편에 남아 있는 효자 정려비이다. 이 비석인 조선초 울산지방 유학자인 송도라는 사람이 받은 효자 정려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비석이다. 원래는 울산시 북구 효문동에 있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 울산도호부 관아 부근으로 옮겼다 한다. 조선시대 정려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비석이다.

정려(旌閭)는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에 세워 표창하던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크게 장려하면서 전국적으로 많이 세워졌다.

<울산도호부 관아 뒷편에 있는 정려비 비각>

<비각>

비각에는 정려(旌閭)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안에 2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비석은 단순한 모양이며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란 글자가 적혀 있다.

<깨어진 비석>

그 옆에 깨어져 있는 비석.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석의 내력에 대해 적은 현판>

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울산광역시 중구 동헌길
송도는 연안송씨로, 조선 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이다. 선생은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生員)으로, 병든 부모를 10여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호했다. 1년 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 지냈다.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10년(1428) 효자로 정려되고 표창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되어 있다. 효문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러한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안송씨 족보에는 정려비가 본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영조 13년(1737)에 울산도호부 서쪽 연못 인근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정려비 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라 적었으며, 뒷편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하였다.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 팔월’이란 구절로 보아, 숙종 38년(1712)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구 우정동에 있던 비석과 비각으로 2006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출처>

  1. 울산시청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