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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신안해저선] 전시개요

1.전시개요2.중국 송대 복고풍 문화3.일본 상류층의 중국 취향4.고려의 공예문화5.차.향.꽃 문화6.경원을 떠나 하카타로7.용천요 청자8.도자기9.도기 항아리, 자단목, 동전10.금속으로 만든 물품11.향신료, 기타12.선상생활

2016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한해저선 발굴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2016년 7월26일 ~ 9월 4일)을 개최하였다. 전시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째는당시 유행했던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적 취향을, 2번째는 중국과 일본과 무역활동을, 3번째는 신안해저선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과 문화교류 양상을 발굴된 유물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전시가 되었다.

신안 해저유물은 전남 신안군 도독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에 발견된 유물들이다. 1975년 어부의 그물에서 중국 용천요에서 만든 청자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4년까지 8여년간에 걸처쳐 발굴이 진행되었다. 약 2만8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청자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선박의 주인을 알려주는 화물 물품표인 목간을 비롯하여, 선원들이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주방기구, 놀이기구, 칼 등과 배에 실린 화물들이 사찰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불교용품과 함께 14세기까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동전들이 포함된 28톤에 이르는 동전도 함께 발견되었다. 신안해저유물들의 발굴조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기관에서 참여하였다고 하며, 발견된 주요 유물들은 현재 중앙박물관 신안해저문화재실에서 볼 수 있다.

<2016년 여름 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전시를 개최하며
신안해저선에 대한 발굴은 1975년 8월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도자기 6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어부는 초등학교 교사인 동생에게 도자기들을 보여주었고, 동생은 이듬해인 1976년 이를 신안군청에 신고합니다. 그 도자기들은 놀랍게도 중국의 원나라(1271~1368년) 때에 존재했던 용천요(龍泉窯)라는 가마에서 만든 청자였습니다. 650여 년이 지났지만 잘 보존된 원대 도자기의 존재가 알려지며 국내외로 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신안 앞바다에서는 몰래 도자기를 건져 올리는 불법적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1976년 10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신안해저선의 존재를 확인하였으며 1984년까지 9년여 동안 배와 힘께 실려 있었던 2만 4천여 점이라는 엄청난 양의 문화재들을 건져 올렸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이번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입니다.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가 타임캡슐처럼 650여 년만에 나타난 신안해저선은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과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이 신안해저선에 대한 연구에 커다란 전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것이 신안해저선을 우리에게 남겨준 옛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며, 40년 전 악조건하에서 발굴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에 대한 존경일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모란넝쿨무늬 큰 꽃병, 청자 모란당초문 대화병,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신안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6점의 도자기 중 하나로 신안해저유물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전시개요
국립중앙박물관은 신안해저선 발굴 40주년을 맞아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개최합니다. 이번 특별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 ‘신안해저선에 담긴 문화기호 읽기’에서는 복고풍의 그릇들과 차, 향, 꽃꽃이 등과 관련된 완상품들이 소개됩니다. 이를 통하여 당시 동아시에서 유행한 중국적 취향과 그에 따른 일본 상류층이 선호했던 문화생활을 살펴보고, 나아가 고려에 있었던 비슷한 문화적 취향에 대해서도 알아봅니다. 제2부 ’14세기 최대이 무역선’에서는 신안해저선이 닻을 올렸던 중국 저장성의 경원(慶元, 현재의 닝보寧波)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역 활동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영상으로 당시 항구의 모습도 재현하여 소개합니다. 제3부 ‘보물창고가 열리다’에서는 신안해저선에 실린 화물들을 도자기, 동전, 자단목, 금속품 및 향신료 등으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또한 신안해저선에 대한 발굴 당시의 모습을 일부 재현하여 전시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신안해저선의 실체와 더불어 중세 동아시아의 교류 양상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발굴당시 신문기사.>

1975년 한 어부가 증도 앞바다에서 끌어올린 그물에 6점의 도자기가 올라왔다. 이 꽃병은 당시 6점 중 1976년 1월 신안군청에 처음 신고된 한 점이다. 이 꽃병을 계기로 신안해저선이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신안해저유물선 모형, 복원기관: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축소비율: 1/10>

발견된 신안선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약 1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무역선이다. 푸젠성 지역에서 사용되었는 선박과 유사하며 중국에서 건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된 선박잔해를 복원한 모습.>

<신안선 평면도.>

<신안선 단면도>

근해를 항해하는 평저선과는 달리 먼마다를 항해하기 위해 V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신안선의 구조와 규모
신안선은 7개의 격벽, 8개 선실을 갖춘 V자형 구조이며, 최대 길이가 약 34 m, 최대폭이 약 11 m, 최대 깊이 약 3.7 m, 중량 200톤급 이상이다. 가히 14세기 최대 무역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배의 하부 구조만이 남아 있어 배의 상면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돛대를 설치했던 자리로 보아 신안선이 주요 동력은 바람이었다. 100여 명은 태울 수 있는 규모이지만, 360여 개의 화물 꼬리표로 파악되는 인원 구성을 고려할 때 탑승자는 6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선은 푸젠성 지역에서 제작된 ‘복선(福船)’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규모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외판이 물고기 비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배 바닥과 앞머리, 뒷머리 용골이 연결된 곳에 보수공(保壽孔)을 파서 동경과 동전을 매납한 점도 푸젠 취안저우(泉州)의 선박 전통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신안선은 푸제 취안저우에서 건조되었을 것이다. 신안선에 상품을 처음 실은 때는 1323년 4월 22일이며, 마지막 선적은 6월 3일에 이루어졌다. 앞서 12~13세기에는 경원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배는 중국 동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산동 지역으로 올라갔다가 한국 서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로 이동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에는 음력 5, 6월의 서남계절풍을 이용하여 경원에서 제주 부근을 거쳐 하카다(博多)에 이르는 직항로가 선호되었다. 신안선은 경원에서 출항한 후 아마도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다도해까지 떠내려와 침몰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중세 동아시아 주요 무역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고대 해상무역로와는 달리 상해부근 닝보에서 일본 하카다까지 운행하는 직항로가 선호되었다. 신안선은 이 항로를 운행하다가 폭풍을 만나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밀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선 출토 청자>

신안선에서는 약 2만8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청자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 상류층이 선호했던 청자를 대량으로 거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 도자기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져 많은 수출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견 당시 모습(재현)>

<신안해저유물 발견과 유적 발굴 기사(1976~1977년)>

<신안해저문물, 국립중앙박물관, 1977년>

<학술대회 발표 자료(국립중앙박물관, 1977년)>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전시도록, 신안해저인양유물,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1983년>

<외국박물관 전시도록>

<시가 쓰여진 접시,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접시의 안쪽 바닥에는 시가 적힌 붉은 잎이 장식되어 있다. 글씨는 “유수하태급, 심궁진일한”이라고 적혀 있는데 “흐르는 물은 어찌 저리도 급한고,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라고 해석된다. 이는 『유흥기』에 나오는 오언절구의 제 1, 2구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