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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신안해저선] 경원을 떠나 하카타로

1.전시개요2.중국 송대 복고풍 문화3.일본 상류층의 중국 취향4.고려의 공예문화5.차.향.꽃 문화6.경원을 떠나 하카타로7.용천요 청자8.도자기9.도기 항아리, 자단목, 동전10.금속으로 만든 물품11.향신료, 기타12.선상생활

신안해저선은 중국 경원항을 출발하여 일본 하카타항으로 향하던 무역선이었다. 배는 최대 길이 약 34 m, 중량 200톤 급의 당대 최대 규모의 선박이었다. 출토된 유물 중 물품의 화물표라 할 수 있는 목간에는 물건을 주문한 사람이나 기관의 이름 및 상품명이 적혀 있다. 목간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신안선은 1323년 4월 하순에서 6월 초순에 걸쳐 화물을 모았으며, 물건을 주문한 곳은 일본의 도호쿠사, 조자쿠암.하코자키궁 등의 절이었다. 이를 통해 신안선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던 무역선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신안해저선 모형>

  최대 길이 34 m에 100여 명이 승선할 수 있는 큰 규모의 화물선이다.  푸젠성 지역에서 사용되었는 선박과 유사하며 중국에서 건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세기 최대의 무역선
1323년 엄청난 수량의 무역품을 싣고 중국 경원(慶元)항을 출발하여 일 하카타(博多)항으로 가던 중 신안 앞 바다에 배가 한 척 침몰했습니다. 침몰 후 65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무역선을 우리는 ‘신안해저선'(이하 신안선)이라 부릅니다. 신안선은 7개 격벽, 8개 선실을 갖춘 V자형 구조이며, 최대 길이가 약 34 m, 최대 폭이 약 11 m, 최대 깊이 약 3.7 m, 중량 200톤급 이상입니다. 가히 14세기 쵀대 무역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의 하부 구조만이 남아 있어 배의 상면 구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돛대를 설치했던 자리로 보아 신안선의 주요 동력은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100여 명은 태울 수 있는 규모이지만, 360여 개의 화물 꼬리표로 파악되는 인원 구성를 구려할 때 탑승자는 6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안선은 푸제성 지역에서 제작된 ‘복선(福船)’과 규모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외판이 물고기 비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유사합니다. 또한 배 바닥과 앞머리, 뒷머리 용골이 연결된 곳에 보수공(保壽孔)을 파서 동경(銅鏡)을 매납한 점도 푸제 취안저우(泉州)의 선박 전통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신안선은 푸제 취안저우에서 건조되었을 것입니다. 신안선에 상품을 처음 실은 것은 1323년 4월 22일이며, 마지막 선적은 6월 3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신안선은 경원에서 출항한 후 아마도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다도해까지 떠 내려와 침몰되었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신안해저선에서 출토된 목간>

. 배의 실렸던 화물주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강사(綱司), 도후쿠사(東福寺), 조자쿠암(釣寂菴), 하코자키궁(筥崎宮) 등이 적혀 있다.

경원을 떠나 하카타로
신안해저선은 1323년에 경원항을 출발했습니다. 경원의 현재 지명인 닝보(寧波)는 오래전부터 중국 남북방의 물산이 한데 모이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원대에는 이곳에 해상무역의 사무를 담당하는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의 다양한 상품들은 해외로 수출되었고, 일본과 고려에서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나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도 내항하였습니다. 신안해저선에서 발견된 목패에는 강사(綱司), 도후쿠사(東福寺), 조자쿠암(釣寂菴), 하코자키궁(筥崎宮) 등이 중요한 화물주로 등장합니다. 이는 신안선의 목적지가 일본의 하카타였음을 말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닝보부지, 寧波府志, 명 가정 연간(1522 ~ 1566년), 중국 텐이거박물관>

『닝보부지』는 명대 닝보부의 지리, 풍속, 인물을 기록한 지방지(地方志)이다. 명대 중후반 닝보 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남해안의 해상 상황을 밝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가정 2년(1523)에 해금정택(海禁政策)의 시행으로 해외무역 업무를 관장하던시박사와 관아 창고인 영풍고(永豊庫)는 해체되어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0

<조야군사이 권20, 朝野群載,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경원항의 출입국심사를 받았다는 공빙을 발급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야군사이는 헤이안시대의 시문, 선지(宣旨), 서찰 등 각종 문서를 분류한 책이다. 12세기에 편찬되었으며,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0의 「다자이후부이국대송상객사」를 보면, 1105년 6월 중국 해상 이충이 일본으로 향하기 전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에 설치된 시박사)에서 무역허가서, 즉 공빙(公憑)을 발급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목간(꼬리표),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 물품에 달려있던 목간이다. 일본에 있는 사찰과 승려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물품의 주인이 누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신안해저선에서 발견된 목간
신안해저선에서는 글자가 쓰여진 화물 꼬리표가 360여 점 발견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꼬리표에 적혀진 내용을 통해, 출항한 연도를 비롯해서 화물 주인과 사원이름, 교역물자의 종류와 수량 등을 알 수 있다. 꼬리표에는 신안선이 출항한 연도인 지치삼년(1323년), 일본에 있는 사원 이름인 ‘도후쿠 사’, ‘조자쿠 암’, ‘하코자키 궁’, 교역 총책임자의 직명인 ‘강사(綱司)’와 선적한 물자인 ‘진피입칠근정오(陳皮: 귤껍질)’, ‘감초(甘草, 약재)’ 등이 쓰여져 있다. 신안선은 ‘지치삼년’인 1323년에 40일 정도 수하물을 준비하여 음력 6월 초에 상품 선적을 완료하고 중국의 닝보를 떠나 하카타를 향해 출발했던 무역선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명문이 새겨진 은덩이, 진정로하간과명 오십량 은정,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중국 저장성박물관. 명문이 새겨진 은덩이, 진정소상과명 오십량 은정,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중국 저장성박물관.>

일본은 예로부터 은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물품 대금으로 은을 지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은덩이,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숟가락, 청동 시,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원연우2년경원로명 청동항아리,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츠시시박물관>

<용무늬가 새겨진 인장,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인장,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동물모양 필가,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벼루,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먹,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정흥좌영부통관방” 인장,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관군총관인상,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도천대법지인” 인장,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파스파문 관부 인장,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명문이 새겨진 저울 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저장성박물관>

<자, 청동 척,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대길”이 새겨진 자, 대길명 목제 척,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경원로”가 새겨진 저울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경원로”가 새겨진 저울추, 원 1320년
무게를 잴 때 사용하는 저울의 청동 추로, 몸통에 “慶元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추는 신안 해저에 침몰한 배의 출항지가 경원항(현재의 닝보)임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추의 몸체는 육각이고, 윗부분이 넓고 아래로 가면서 사선으로 좁아지는 형태이다. 몸통과 받침은 굵은 선을 둘러 구분했고, 선 아래로 다시 경사를 이루며 넓어진다. 받침 너비와 몸통 너비가 같다. “경원로”가 새겨진 반대 면에는 “경신년”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다. 신안선이 침몰한 해와 가까운 1320년 경신년으로 추정된다. 이것과 모양이 비슷한 청동 추가 중국 저장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저울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저울대,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저울접시,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연우2년경원로명 저울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중국 츠시시박물관>

<신안해저선이 발견된 지점.>

침몰과 발굴,
신안해저선은 음력 6월 초, 상품 선적을 완료하고 출항한 후 한두 달이 안 되어 침몰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로부터 652년이 지난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꽃병 등 6점의 도자기가 걸려 올라왔습니다. 이듬해인 1976년 문화재관리국(현재의 문화재청)이 본격적으로 신안해저선의 발굴과 인양을 개시했습니다. 매일매일의 발굴 소식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으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규모가 엄청났을뿐만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난 문화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습니다. 신안해저선 발굴은 198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신안해저선 발견 지점>

신안해저선의 발견 지점
전라남도 신안 지역에는 예전부터 옛 배가 침몰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구전을 입증하듯 1975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에서 침몰선이 발견되었다. 임자도와 증도에서 각각 4 km 떨어진 중간 지점이다. 평균수심이 20 m내외로 바닥이 진흙으로 이루어진 내만(內灣)으로, 세차고 복잡한 조류로 인해 물이 혼탁하고 연중 시계가 좋지 않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