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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 후원에 세운 이궁

경복궁 북쪽편 향원정이 있는 곳에 위치한 건청궁은 경복궁 중건 후 고종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지은 이궁(離宮)이다. 고종은 건청궁 옆 서재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던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연못인 향원지와 함께 번잡한 궁궐을 떠나 이곳에 머물기를 좋았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사대부 저택처럼 지었는데, 창덕궁 낙선재, 연경당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궁궐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상을 두지 않고 있지 않지만, 건물 규모는 250여칸으로 꽤 큰 규모이다. 고종이 어린시절을 사가(私家)에서 보내다 궁궐로 들어오게 되어서 그런지 궁궐생활에 꽤나 답답해서 건청궁같은 이궁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건청궁에서의 고종의 생활 또한 그렇게 편안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경복궁 건청궁>

건청궁은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건물로 국왕이 머무는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인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서재인 관문각, 부속건물인 복수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청궁 앞에는 연못인 향원지가 있고, 서쪽에는 편전 역할을 했던 서재인 협길당과 집옥재를 두어 별궁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건청궁은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고종의 바램과는 달리 구한말 정치적 혼란기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고, 이 곳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다. 건청궁이라는 이름은 북경 자금성에 있는 황제의 처소인 건청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며, 당시 고종의 생각에는 중국은 상당히 발전된 나라라고 생각했던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것을 2007년에 중건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건청궁 정문>

솟을대문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 정면에 정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청궁 문간채 행각>

창고나 마굿간 등이 많은 일반 사대부 저택과는 달리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물수 있는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坤寧閤)

건청궁 내전은 일반 민간 저택의 안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명성황후가 머물던 장소인 곤녕합과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인 옥호루(玉壺樓), 그리고 부속건물인 복수당(福綏堂)을 비롯한 여러동의 행각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건청궁은 경복궁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외부 담장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경호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 장소로 보이며, 그런 이유로 해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을 겪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함광문(含光門)>

<함광문 앞 마당과 행각>

<곤녕합 마당과 행각>

왕비를 수행하던 인원들이 거처하는 방들로 이루어졌다.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방들 앞에는 걸터 앉을 수 있는 작은 툇마루가 있다

<곤녕합과 누마루인 옥호루>

명성황후가 이 곳에서 옥호루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ㅁ’자형 형태를 하고 있는 일반 사대부 저택이나 낙선재 안채와는 달리 ‘ㄱ’형을 하고 있다. 가운데 2칸은 왕비가 손님을 접견하는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누마루 형태의 옥호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옥호루>

장안당과는 달리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누마루형태를 하고 있다. 문을 열면 바람이 잘 통해서 정자같은 분위기를 준다. 이곳이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라고 전해진다.

<대청마루>

가운데 왕비가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대청마루 2칸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내부>

<동쪽 행각>

<청휘문>

곤녕합 동쪽 행각에 있는 출입문이다. 일반 사대부 저택의 안채 출입문과 비슷한 형태이다.

<곤녕합 뒷마당 정원>

<정시합>

옥호루 뒷편으로 2칸 정도 돌출된 정시합(正始閤)이라는 방이 있다. 뒷마당 정원을 감상하면서 휴식하는 공간이다.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통해 대청마루를 드나들 수 있다.

<곤녕합 뒷편 별채 건물인 녹금당(錄琴堂)>

안쪽으로 복수당을 비롯한 행각과 부속채들이 들어서 있다.

<작은 골목길처럼 꾸며진 부속채 행각들>

<복수당>

사랑채에 해당하는 장안당(長安堂)

건청궁에서 고종이 주로 머물면서 업무를 보던 장소인 장안당은 일반 사대부 대저택의 사랑채와 비슷하게 지은 건물이다. 서쪽편에는 구한말에 유행했던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누마루가  있으며, 뒷쪽편에도 작은 툇마루를 두어 정자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건물에는 궁궐을 상징하는 추녀마루 잡상이나 답도 등을 두고 있지 않다. 창덕궁 영화당이나 낙선재처럼 당시 국왕들은 궁궐의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바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안당 출입문인 초양문(初陽門)과 행각>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연결되는 복도>

조선후기 건물에는 이런 복도를 많이 볼 수 있다.

<장안당>

일반 사대부집의 사랑채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앞쪽으로 향원정 연못이 보이는 한적한 분위기를 주는 이 곳을 고종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 곳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7칸 정도 규모이다.

<누마루인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문을 열면 바람이 잘 통하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하는 누마루이다.

<대청마루>

장안당은 가운데 3칸은 고종의 용상이 있는 대청마루이며, 서쪽편으로 3칸, 동쪽편의 1칸짜리 방이 있다. 동쪽편에 위치한 안채인 곤녕합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 내부>

<뒤에서 본 모습>

사랑채 뒤쪽편에 툇마루를 두어 작은 정자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구한말 한옥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고종이 서재로 지었던 관문각이 있었던 자리>

<헐리기 전 관문각 사진>

서양식 건물을 중심으로 행각들이 들어서 있다

관문각지
이곳은 고종10년(1873)에 건립된 관문각 터이다. 건청궁 내 장안당 뒤쪽에 위치한 관문각은 당초에 관문당으로 불렸으나, 고종12년(1875)에 어진을 봉안하고 관문각으로 고쳤다. 고종28년(1891)에 러시아 건축가 세레찬 사바틴(A.S.Sabtine)과 친군영이 공사를 맡아 2층(일부3층)의 서양식 건물로 개축되었다. 최초의 양관으로 불리기도 한 이 건물은 국왕의 서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와 대조를 이뤘다. 집옥재와 관문각 사이에는 서양식 기계추 시계탑도 세워졌다. 사바틴이 관문각에 기거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여 고발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관문각이 헐린 시기는 광무5년(1901) 이후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필성문>

<건청궁 서쪽 담장>

집옥재로 나가는 출입문인 필성문(弼成門)이 있다.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나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어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