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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탕평비, 영조가 붕당정치 폐해를 해소하고자 세웠던 비석

공자를 모신 서울 문묘(文廟)가 있는 성균관대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조선후기 영조가 세운 탕평비를 볼 수 있다. 탕평비는 1742년(영조18)에 자신의 집권한 이래 붕당정치의 폐해를 해소하고자 펼친 탕평책을 대외적으로 표방하기 세운 비석으로 관직 진출을 준비하는 새로운 인재들이 모여 있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붕당정치를 경계하도록 세웠다.

<성균관 탕평비>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 숙종대부터 이어져온 붕당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는 조선이 건국한 이래 양반의 수는 계속 늘어났지만,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관직의 수는 제한적이었기때문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집권 후 당쟁을 해소할 것을 천명하고 각 당파의 화합을 주선하고, 각 정파의 온건론자를 중용하였다. 또한 주요 청요직에 각 정파의 인물들을 균형있게 등용하였다. 이런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되어 집권 17년차에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성균관 정문에 탕평비를 세웠다. 영조는 당파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으나, 노론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근본적인 약점때문에 적극적으로 당파를 제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소론과 가까웠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었다.

<비각안에 있는 탕평비>

<비석에 새겨진 글>

<뒷면>

탕평비에는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원문은 예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라는 뜻이다.  영조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탕평비 받침돌>

꽃문양을 새겨 놓기는 했지만 형식적이며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지붕모양을 하고 있는 머릿돌>

<탕평비를 볼 수 있는 문묘 대성전 앞 도로>

문묘 입구 반수교에 탕평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문묘 앞에는 반수(泮水)라는 작은 하천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곡부(曲阜) 공묘 홍두문 앞에 벽수(璧水)가 흐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성역과 바깥세상을 분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탕평비
1742년(영조18)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반수교 위에 세워진 비석. ‘탕평’이란 <서경>에서 온 것으로,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에 새겨져 있는 내용는 논어 위정편 14장을 활용하여 영조가 지은 것으로,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뜻이다. 당시 조선은 붕당 정치의 폐해가 심화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조는 장차 국가를 이끌어 갈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치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친필을 내려 탕평비를 세웠던 것이다. <출처:서울시청>

<하마비>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 향교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이다. 공자를 모신 성역을 들어갈때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로 세운 비석이다.

하마비
조선시대 종묘, 궐문 및 문묘 앞에 세워놓은 석비이다. 1413년(태종13)에 처음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든 표석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 비석 전면에는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시하고 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출처:서울시청>

참조: 1. 탕평비, 네이버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탕평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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