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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미술 속 도시] 20세기초 근대 미술을 이끌었던 화가들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물이 급격하게 들어오면서 미술가들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부는 서양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였으며, 전통 미술을 계승했던 화가들도 서구의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는 등 시대의 흐름를 따르게 된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과 안중식은 새루운 경향을 받아들였으며 당시 미술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한양의 중인층들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 초 한국의 미술계를 이끌어던 대표 화가들의 작품에서 근대 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서울풍경, 휴버트 보스(1855~1935년), 대한제국 1899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작품이다. 당시 한양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휴버트 보스의 작품으로,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이다. 주한 미국 공사관 부근 (현재 정동)에서 경복궁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화면 아래 나지막한 기와집들 사이에서 솟아오른 경복궁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 위로는 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이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이지만, 낯선 이방인 화가 휴버트 보스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지리적 입지와 전통적 경관이 지닌 특징을 분명하게 포착해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 근대를 만나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문물과 신매체가 도시에 밀려 들어왔습니다. 미술가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또 다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서화 교습소나 미술 단체를 중심으로 근대 화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외국 유학을 떠나 ‘서양화’로 진로를 찾아간 화가들도 생겨납니다. 미술가들은 사진,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인쇄 매체에 적응하거나, 제작소에서 상품이 된 공예품을 생산하는 등 변화의 흐름에 발맞춰 변신을 꾀합니다. 그들은 근대 문물의 세례 속에서 식민지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도시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인 자화상, 그리고 낯익은 과거와 낯선 현재가 뒤섞인 도시 경관의 그림은 그러한 근대의 고민을 보여 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도화서 출신 화원으로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안중식의 작품이다. 전통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식 투시도법 등 서양화의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화면 상단 가운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중심으로, 새벽안개에 가려진 경복궁과 광화문의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 광화문과 해태상 사이는 서양식 투시도법을 적용하였고, 화면 아래 종로 육조거리는 텅빈 채로 적막감이 감돈다. 1915년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냈던 시기로,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제작 배경에서 마지막 도화서 화사로서 안중식의 자존감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을 표현한 부분.>

근대의 길목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전통의 시대는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고 미술계에도 예외 없이 변화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1853~1920년)과 안중식(1861~1919년)은 전통과 근대를 잇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여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화고동의 취미는 당대 모던보이들에게 대물림되면서 여전히 유행하였고, 더욱 장식적이고 감각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여항문인에서 모던보이로 이어지는 도시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위의 그림과 비슷한 구도와 내용으로 그렸다


<기명절지, 안중식, 1914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 구한말 많이 그려졌던 그림 형태로 섬세한 표현과 화려한 색감 등 서구의 미술기법을 받아들여 세련되면서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식이 그린 대련의 기명절지도이다. 이전의 기명절지가 주로 담채로 그려진 데 비해, 안중식은 서양식 명암법을 구사한 정밀한 묘사와 사실적인 채색, 그리고 세로로 긴 화면에 맞는 길쭉한 기물의 배치로 세련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업 이후 기물이 풍부해지고 정밀한 묘사가 더해져 완성도가 높아진 안중식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기명절지, 조석진,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 색>

. 19세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서창청공(書窓淸供)” 즉 ‘서재의 말고 깨끗한 선비의 물건’들을 뜻하는 화제가 적힌 도화서 화사 출신 조석진의 작품이다. 크고 작은 고동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그 아래로 가지나 붉은 무, 배추, 방송이 등과 같은 친숙한 소과들이 어우러져 있다. 사실적인 표현에 주력했던 안중식에 비해 이전 시기 장승업 화풍의 영향이 간취된다. 정확한 묘사보다 엷은 담채로 대상을 담백하게 그리는 전통의 양식이 근대에까지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기명절지, 이도영(1884~1933년).고희동(1886~1965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이홍근 기증>

. 전통 화법을 계승한 화가와 서양화를 배웠던 화가가 함께 그린 그림으로 어색함 없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고희동과 이동영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들의 스승인 안중식이 글을 남긴 합작도이다. 화면 우측 이동영은 기물의 음영이나 입체감을 강조하지 않고 담백한 필치를 구사한 반면, 고희동은 옥수수 알의 색을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묘사하는 등 과일의 색채와 명암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전통 화법을 계승한 이동의 화풍이 한 화면 안에서 대조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기명절지, 이도영, 1923년, 종이에 색, 국립현대미술관>

장승업에서부터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진 기명절지도는 관재 이도영에 이르러 꽃피웠다. 안중식의 첫 제자인 이도영은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아 온건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향로를 비롯한 고동기류에서부터 무와 밤, 고추와 같은 흔한 소채까지 소재의 폭이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해동역대명가필보, 한남서림 간행, 1926년, 종이에 인쇄>

출판사이자 서점이었던 한남서림에서 낸 역대 필적 700점을 모은 서책으로, 표제는 오세창이 썼으며, 책머리에는 김규진(1868~1933년)의 휘호와 윤희구(1867~1926년)의 서문이 있는데, 이들 모두 한남서림 대표 백두용(1872~1935년)과 가까이 교류했던 서화가들이다. 특히 이 서점을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여 이곳에 들어오는 고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였고, 훗날 1938년 보화각 건립에 토대가 된 의미 있는 곳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한동아집첩, 오세창(1864~1953년), 1925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도서관>

오세창을 비롯한 김돈희(1871~1937년).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한학자이자 시인인 이기(1856~1935년), 승려 박한영(1870~1948년), 역사학자 최남선 등 7명이 시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화첩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술직 중인 집안 출신으로, 선조들의 시사 전통을 따르며 암울한 일제강점기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은일지사의 풍류를 추구하였다. 신지식층이면서도 고전과 민족문화의 연구에 몰두했던 이들에게 시회는 전통과 고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합벽도, 김규진(1864~1933년) 외, 1920~1933년 경, 종이에 엷은 색>

1920년대를 대표하는 서화가 14명이 각각 글과 그림을 나누어 그린 합작도이다. 해강 김규진, 위창 오세창에서부터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서화가들이 참여하였다. 안중식, 조석진이 빠진 것으로 보아 1920년대 이들이 세상을 뜬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기 성행하였던 서화합벽도 제작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화가들의 친목 관계를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난죽석도, 김규진, 1922년, 비단에 색, 개인소>

세로 1.9미터가 넘는 김규진의 대형 난죽석도이다. 그의 문집과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나 실제로는 출품하지 않았다. 김규진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능동적으로 활동한 서화가였다. 대중의 취향을 잘 파악하여 상업화할 줄 아는 선구적 감각이 있었던 그는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호를 딴 이른바 ‘해강죽’으로 유명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장송낙일, 지운영(852~1935년), 1917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근대 지식인이자 서화가였던 지운영의 작품으로, 해질 무렵 높이 솟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였다. 지운영은 안중식, 조석진과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갔던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외국에 나가 선진 문물을 수용한 서화가이자 근대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면에 적힌 글을 통해 함께 함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적 있는 박영효에게 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의 자화상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배출한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에서는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 졸업작품으로 남겨 놓았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졸업후 모두 서양화가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술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1915년, 고희동(1886~1965년)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최초의 서양화가가 등장하였고, 당시 그의 졸업은 신문에 날 만큼 큰 화제 거리였습니다. 1920~30년대가 되면 미술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 유학생이 증가하고 각종 전람회와 전시 공간이 확대되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서양화가들의 졸업작품인 자화상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화가 자신의 내면이 드러납니다. 화가들은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의 변화와 함께 일상의 풍경과 삶을 포착하며 삶과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나갔습니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근대적으로 변모한 경성의 다양한 모습은 유혹과 동경, 환상과 절망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자화상, 고희동,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자화상으로,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유화작품 중 하나이다. 고희동은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하고 1909년 24세에 궁내부 주사의 자격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이 자화상은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인 관료이자 유학생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높은 정자관을 그리기 위해 본래 자화상 규격보다 긴 캔버스를 사용했다. 궁내부 주사로서 6년간 일했던 한국인 관료이자, 한국인 유학생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자화상, 김관호(1890~1959년), 1916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토교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김관호는 191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 <자화상>에는 선배 고희동의 것과 달리 양장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세련된 근대 지식인의 당당함이 반영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서 탄탄한 데생 능력과 뛰어난 색채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화제를 모은 김관호는 귀국 후 개인전을 개최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1927년 이후 화단에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자화상, 김찬영(1889~1960년), 1917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세번째 한국 졸업생으로, <자화상>은 현재 전하는 그의 유일한 유화 작품이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붉은 구름이 피어나는 강가의 풍경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졸업 후 김찬영은 한국유화가 1세대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면서 서양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자로서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고미술수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자화상, 김용준(1904~1967년), 1931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화가이자 평론가, 미술사학자이면서 『근원수필』의 저자로 잘 알려진 김용준의 자화상이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유학 시절, 전통서화를 경시하다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를 본 순간 서양화가로서 갖고 있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꺾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은 근대 지식인이나 화가의 모습이 아닌, 한복을 입은 젊은 한국 청년으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졸업 이후에도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293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 회화로 전향하여 조선미술의 특징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면서 전통 서화의 사상과 양식을 계승하는 현대미술을 모색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자화상, 길진섭(1907~1975), 1932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길진섭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생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미술인들은 다변화 양상을 보인다. 이 자화상에서는 흰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맨 1930년대 전형적인 도시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날카로운 눈매로 정면을 응시한 채 왼쪽으로 몸을 삐딱하게 돌린 모습은 화가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 한자 “吉”과 한글 “진섭”으로 쓴 서명은 이 시기 서양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인물회화, 고희동, 이도영 외, 1933년 이전 종이에 먹. >

춘곡 고희동의 생일날 모임에서 남긴 메모와 그림, 이용우, 이한복, 이도영, 변관식, 이상범이 글과 그림을 남겼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김주경 (1902~1981년), 1927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20년대 북악산을 배경으로 경성부청 건물이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조선은행의 상징인 원형 돔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0년대 서울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건물들이 건립됐던 시기로, 경복궁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육중한 코크리트 건물들이 만들어 낸 경관은 도시의 새로운 상징이 되어 버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