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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차산성(사적),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산성

아차산성은 아차산(해발 285m)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아차산성을 누가 쌓았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원래 백제가 왕성이었던 하남 위례성(풍납토성)을 외곽에서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원래는 행주산성처럼 토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점령하여 사용하다가, 한강유역 장악한 신라가 현재에 남아 있는 석축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성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중요한 2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등장한다. 첫번째는 백제의 왕성이 고구려군에 점령당했을 때 개로왕이 이곳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두번째는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이곳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

<아차산성 성벽>

아차산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하남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 쌓았으며,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령하여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물러나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만들었다. 현재의 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석축을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을 오르는 등산로 입구>

아차산에는 삼국시대 산성인 아차산성을 비롯하여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능선을 따라 쌓은 보루들을 볼 수 있다. 아차산 북쪽 용마산까지 능선이 이어지며 용마산에도 보루들이 있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조각상>

아차산성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삼국이 치열한 전쟁을 벌렸던 곳으로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이곳에서 전사하였으며, 백제가 웅진(공주)로 천도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군을 이끌고 내려왔던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도 아차산성이라고 한다.

<등산로>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

아차산 줄기가 한강과 만나는 끝자락 위치한 구릉위에 산성을 쌓고 있다. 아차산성은 1996년 이후 두차례 발굴조사를 했지만, 향후 정밀한 학술조사를 위해 지금은 울타리를 만들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아차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성벽을 샇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 전체 길이는 약 1.1km이며, 성벽의 높이는 10m정도되는 요새라 할 수 있는 산성이다. 동.서.남쪽에 성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 있고 정상부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장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서는 여러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많은 토기과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 성벽을 쌓고 있는 석축은 상당부분 남아 있는데 중간 크기의 돌은 다듬어 촘촘히 쌓은 형태는 고구려 산성과 이에 영향을 받은 신라 산성의 석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성벽>

아차산성은 성벽높이가 7m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중간 크기의 잘 다듬은 돌로 촘촘하게 석축을 쌓고 있다. 고구려 산성 성벽의 특징이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산성 석축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2009년 여름 아차산성>

<이어지는 성벽>

<아차산성 정상부>

<위에서 본 모습>

<정상부로 오르는 길>

발굴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다.

<정상부 아래 석축>

<정상부 부근>

아차산성 복원.정비사업안내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백제 책계왕 원년(서기286)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에 미루어 백제가 처음 축조한 산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싸움에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당시 치열했던 삼국간 한강유역 전투의 중심에 있었던 곳입니다. 아차산성은 1973년 사적 234호로 지정됨에 따라 광진구에서는 이 아차산성의 복원.정비를 위하여 1996년 이후 제한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학술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만, 아차산 일대 고구려 군사보루 (요새)군이 2004년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면서 향후 정밀한 학술조사를 실시할 계획입니다. 이 아차산성을 정밀 조사한 후 복원.정비하여, 2009년 7월 완공한 고구려정 및 아차산 자락(광장동)에 건립할 예정인 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관과 함께 인근 송파구의 한성백제박물관, 강동구의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연계한 관광벨트를 개발하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지역경제 활성에 기여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출처:광진구청>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아차산 보루 오르는 길>

아차산성을 지나서 능선을 따라 가면, 고구려가 쌓은 군사요새인 아차산 보루와 최근에 세운 고구려정을 볼 수 있다. 능선에 세워진 고구려 보구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한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아차산 고구려정에서 본 아차산성>

아차산 일대에는 비교적 낮고, 한강과 가까운 곳에 세운 산성이다.

<풍납토성 일대>

아차산성 아래에 위치한 워커힐호텔 식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 부근이다. 아차산성을 고구려군에 점령당했다는 것은 백제가 왕성을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차산성, 사적, 삼국시대,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단성 또는 아차성이다. <삼국사기>에 이 성을 286년(백제 책계왕 28)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396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과 1999년에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차산성은 부정 육각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는다. 성벽의 높이는 7m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안팎 모두 잘 다음은 돌로 쌓았다. 성벽 바깥쪽 기저부는 별도의 보강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다져서 덮었다. 해발 203m의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서.남쪽에 문지가 남아 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 우물,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백제가 수도 한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이 산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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