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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청풍도호부 관아, 동헌인 금병헌과 아문인 금남루

충북 제천시 청풍면 읍리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는 옛 청풍도호부(淸風都護府) 관아이다. 청풍도호부는 제천시 청풍면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종3품인 부사가 파견되었던 큰 고을이었다. 충주, 단양과 함께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조선 세조때 청풍군이 설치되었다가 조선후기 현종 때 현종비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죽령을 통한 교통로로 한강조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지역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청풍도호부사는 관료들이 선호했던 관직 중 하나였다.

청풍도호부 관아건물로는 부사가 근무했던 동헌인 금병헌, 관아 아문인 금남루, 관아에서 운영했던 정자인 한벽루(보물 528호)와 응청각이 남아 있다. 관아가 있던 읍리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지금은 남한강변에 조성한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져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볼 수 있는 옛 청풍도호부 동헌인 금남루>

옛 관아가 있던 읍리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관아 아문인 금남루(錦南樓)

조선 순조때(19세기 초)에 세워진 관아 아문으로 건물의 내력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앞면 3칸 규모의 문루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2층의 문루를 올려 놓았다. 바깥쪽에는 ‘도호부절제아문’, 안쪽에는 ‘금남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고을 수령이나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읍성내 풍경을 살펴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풍도호부 관아 아문>

비교적 큰 규모의 문루로 2층 계단에 올라서 읍성내 마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쪽에서 본 아문>

이 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1900년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동헌인 금병헌(錦屛軒)

금병헌은 조선 숙종때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인 1900년에 다시 지어졌다. 외관이나 여러 형태로 볼때에도 구한말에 많이 지어진 한옥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 6칸, 옆면 3칸으로 부사가 근무하던 동헌 건물로서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오른편에 큰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편에 온돌방 3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풍도호부 동헌인 금병헌>

앞면 6칸 규모로 오른쪽에 대청마루가, 왼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온돌방과 누마루>

<작은 온돌방>

건물 왼쪽편에는 손님을 접견하는 넓은 온돌방과 누마루 용도로 지어진 방이 있다. 대청마루 옆에는 도호부사가 일상적으로 집무를 보는 작은 온돌방이 있다.

<대청마루>

오른쪽에는 민원인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뒷편에서 본 모습>

  바깥경치를 볼 수 있도록 대청마루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 32년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이니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누각 건물인 한벽루(寒碧樓, 보물)와 부속건물들

청풍도호부 관아의 핵심 건물인 객사는 남아 있지 않으며, 객사에 딸린 작은 정자 건물인 응청각과 도호부사가 주최하는 공식연회 등을 갖기 위해 지어진 누각건물인 한벽루가 부속건물로 남아 있다.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크고 작은 부속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한벽루(보물)>

청풍도호부 관아 객사 옆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건물인 한벽루(보물 528호)이다.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회와 행사가 치러졌던 공간이다.

<응청각>

객사 옆에 있던 부속건물인 응청각이다. 청풍도호부를 방문하는 고위 인사들이 묵었던 숙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진 청풍도호부사를 지낸 인물들을 위해 세워진 송덕비들>

청풍도호부 읍성 문루였던 팔영루(八詠樓)

청풍도호부 읍치를 출입하는 성문과 문루이다, 조선초기. 팔영루를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읍성을 구축할 때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팔영루는 2.2 m 기단에 크지 않은 4각형의 출입문을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려놓고 있다. 성문 문루로서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 이는 전쟁을 대비한 것이라기 보다는 형식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팔영루 문루>

문루 바깥쪽에는 ‘팔영루’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현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팔영루’라는 이름은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청풍이 조선후기에 양반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관동팔경 유람길을 마치고 죽령을 넘어서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있는 고을이라서 유명 인사들이 많이 다녀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쪽에서 본 팔영루>

<팔영루 문루>

이 곳은 청풍부를 출입하는 관문이다. ‘현덕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종 7년(1870)에 세운 ‘팔영루 사적비’에 의하면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중건하고 현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 7년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읍리 286번지의 청풍 북쪽에 있었으나, 1983년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2 m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고, 문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다락집을 세웠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4.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