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영주 무섬마을, 물위에 떠 있는 섬처럼 생긴 아름다운 전통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전통마을인 무섬마을이다. 조선후기 반남박씨 박수가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했으며, 그의 증손사위 선성김씨 김대가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나가서 마치 섬처럼 보인다고 하여 ‘무섬마을’이라고 부른다.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전형적인 양반마을로 구한말에는 주민 50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작은 시골마을로 남아 있다.

마을에는 반남박씨 종택인 만죽재와 선성김씨 종택인 무송헌, 가장 큰 규모의 저택인 해우당을 비롯하여 격식을 갖춘 ‘ㅁ’자형 가옥, 경북 북부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까치구멍집,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규모의 초가집 등 다양한 형태의 가옥들이 남아 있다. 가옥들은 대부분 마을 뒷산을 등지면서 내성천을 향해 서남향을 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형상이 물위에 떠있는 배와 같다고 하여 마을에는 우물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한다. 마을을 들어오는 다리인 수도교가 생긴 1979년 이전에는 좁은 외나무다리를 이용해서 마을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외나무다리가 마을을 대표하는 경관을 만들어 주고 있다.

<영주 무섬마을>

마을 건너는 다리인 수도교 앞에서 보이는 무섬마을이다.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으며 흐르고 있다. 내성천이 있는 서남쪽을 향해 배산임수의 지형을 잘 갖추고 있다. 마을에는 농토가 없으며 마을 앞 내성천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유일한 통로였다.

<무섬마을 모형>

<1979년에 세워진 수도교>

<마을 북쪽>

작은 정자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아도서숙이 있었다.

<김성규 가옥>

수도교를 건너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고택인 김성규가옥이다. 독립운동가 김성규가 살았던 집으로 시인 조지훈의 처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분가하면서 지어진 집으로 홍수 피해을 입어 폐가가 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입구에 있는 해우당고택>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저택으로 구한말 고위관리를 지낸 김낙풍이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쓴 ‘해우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해우당고택 뒷편 큰규모의 고택인 주실고택>

<주실고택 맞은편에 있는 최근에 수리하여 지은 것으로 보이는 집>

<주실고택 뒷편 골목길>

<해우당고택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고택>

<수춘재라 불리는 비교적 큰 규모의 고택>

다른 가옥과는 달리 사랑채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툇마루를 넓게 만들어 누마루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사랑채 기둥이 원기둥 모양을 하고 있으며, 종택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춘재 옆에 있는 섬계고택>

섬계는 무섬마을을 대표한는 인물로 손꼽히는 박제익의 호이다. 지금은 선성김씨 김동근가옥으로 되어 있는데 그와 관련된 집으로 보인다.

<섬계고택 안쪽에 있는 만죽재고택>

반남 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17세기에 마을로 이사오면서 처음 자리잡은 종택을 마을 중심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종택답게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는 고택이다.

<섬계초당>

종택 뒷편에는 섬계 박제익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교류하던 섬계초당이 있다. 그 앞쪽에는 선성김씨 종택에 있는 사당이 보인다.

<섬계고택과 만죽재고택 뒷편에 있는 집들>

<만죽재고택 앞에 있는 6칸 규모의 작은 까치구멍집>

<만죽재고택 앞쪽 무송헌종택>

선성김씨 입향조인 김대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세종 때 천문학자로 큰 업적을 남긴 무송헌 김담(1416~1464년)의 종손(?)이어서 무송헌종택이라 부른다. 고택 뒷편에는 김담을 비롯한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무송헌종택을 들어가는 골목길>

<골목길 왼쪽에 있는 오헌고택>

큰 규모의 저택으로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의 후손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골목길 오른쪽에 있는 농당고택>

<만죽재고택 안쪽 김덕진가옥>

<옆에 있는 김위진가옥>

<김위진 가옥 옆쪽에 있는 작은 규모의 초가집>

안방과 사랑방이 한건물에 있는데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분가한 후손이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앞쪽에 있는 까치구멍집인 김규진가옥>

<앞쪽에 있는 큰 규모의 고택>

‘오당’이라 걸린 현판이 걸려 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김정규가옥>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마을에 있는 6칸 까치구멍집에 비해 규모가 확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남쪽편으로 제방길>

아래에 무섬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다.

<남쪽편 제방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마을 앞에 있는 제방길>

내성천과 함께 한적한 시골마을 경치를 더해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제방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외나무다리>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마치 섬같은 지형을 하고 있는 무섬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다리이다. 다리는 길이 약 150 m, 폭 20 ~25 cm, 높이 60 cm로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다리이다. 옛스런 고택들이 모여있는 무섬마을을 운치있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다리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비껴다리>

다리 중간에 비껴다리를 만들어 마주 오던 사람이 비껴갈 수 있게 만들었다.

<외나무다리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영주 무섬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이 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마을 동쪽 500 m 지점에서 합류하여 마을 전체를 태극 모양으로 한바퀴 휘감아 돌고 있어, 마을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하여 ‘무섬’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입향조인 박수(반남박씨)선생께서 1666년(현종 7) 강건너 ‘머름’에서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여 터전을 이루었다. 그 후 박수 선생의 손자의 사위인 김대(선성김씨)선생께서 영주에 있는 삼판서 고택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되어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자연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뒤로는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강을 향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부촌으로 한때는 마을 소유의 토지가 30리 밖에까지 이르렀으나 정작 마을에는 농지가 없어 강을 건너 가서 농사를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만세운동 이후 각처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일본 경찰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이곳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동네 주민들과 함께 아도서숙을 건립하여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해우당 고택과 만죽재 고택 등을 비롯하여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입구자형(‘ㅁ’)가옥, 까치구멍집, 겹집, 남부 지방 민가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와 양식을 갖춘 집들이 많이 있어 전통 주거 민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