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재 권벌 종가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많은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충재일기(보물 216호)는 그가 승정원 등 중앙관직에 재직할 때 쓴 일기로 임진왜란 이전 역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한 고문서(보물), 전적(보물)에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문서들로 과거시험지, 과거합격자 명단, 합격증, 각종 사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종가에는 전국 여러 종가들 중에서도 많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에 이를 잘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어,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에게 그의 삶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충재 권벌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사관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기묘사화에 화를 입기도 했으며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평안도 삭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중기 사림의 등장시기를 대표하는 문신 중의 한명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봉화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충재일기, 보물, 중종 2년(1507) ~중종 13년(1518). 충재 권벌이 예문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있을 때 쓴 자필일기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쓴 승정원 일기등 주요 문서가 소실되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인 충재 권벌(1478∼1548)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권벌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에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권벌의 문집인『충재집』에도 실려있으며,『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와같이 당시 관료로서 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승정원일기』가 남아있어 그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유희춘의『미암일기』, 이이의『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뛰어난 권벌의 필체와 문장만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기록이다. (문화재청, 2010년)
충재일기, 보물 896호, 중종 9년(1514) ~ 중종 10년(1515). 충재 권벌이 영천군수로 재직할 때 쓴 쓴 자필일기로 개인 생활과 지방관직으로 근무할 때의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충재일기, 관직에 근물할 때나 재야에 있을 때 쓴 것으로, 그 높은 중요도로 인해 실록편찬시 참고되었던 것들이다.
충재선생과 사화
충재선생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번의 큰 사화를 겪게된다. 두번의 사화시기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평가와 함께 복권 및 증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정덕2년 3월 문무잡과 방목, 보물 896호, 중종2년(1507). 문과.무과.잡과 세 개과의 합격자 명단을 적은 것이다. 을해자본으로 인쇄된 서적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 한다.
시권, 보물 901호, 당시 충재선생이 과거시험에 제출했던 답안지라고 하며, 당시에는 과거응시자에게 답안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홍패, 보물 901호, 중종 2년(1507), 과거의 최종합격자에게 내어주던 증서, 충재선생이 조선 중종 2년 별시문과에 병과 제이등으로 합격한 하사받음.
교지, 보물 901호,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던 사행문서.충재선생 관직 이동시 받은 사령장이다.
유서, 보믈 901호, 중종33년(1538), 관찰사, 절도사 등의 부임시, 징병할 수 있는 밀부를 내리는 국왕의 명령서, 중종이 경상감사인 충재선생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내린 유서이다.
유지, 보물 901호, 중종 34년(1539). 승정원을 통해 발급된 왕의 명령서이다. 중종34년 충재 권벌이 개종계주청사(사신)로 명나라를 방문할 때 받은 유지이다.
광국원종공신녹권, 보물 896호, 선조 24년(1591). 나라에서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증서. 선조 24년(1591) 국가에 이바지한 공으로 인해 충재선생에게 내린 녹권. 충재선생 사후 43년만의 일이다.
교지, 보물 901호, 선조 24년(1591), 그의 사후 선조때 영의정에 추증한다는 왕의 명령서인 교지이다.
교지, 보물901호, 선조 1년(1568). 그의 사후 부인인 최씨에게 남편의 직에 따라 정경부인으로 증직하는 교지이다.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 호는 추쟁.환정, 시호는 충정이다. 연산군2년(147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과 각 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를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화를 연이어 입었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윤 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삼대신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와 ‘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도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출처>
-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 문화재청, 2010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