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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이집트보물전] 영원한 삶과 미라

미이라(The mummy)는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이집트문명을 상징하는 키워드이자 당시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흔적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인이의 영혼이 시신에 머문다고 생각하여 시신을 보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사막지역인 이집트의 지리적 특징과 함께 많은 미이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시신을 모셨던 관과 껴묻거리 등에는 당시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바램과 살았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영원한 삶과 미라
영원한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죽은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사후세계에서의 영원한 삶은 죽은 이의 몸이 보존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믿었고, 주검을 미라로 만드는 것은 장례절차의 시작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역사』에서 비용에 따라 미라를 만드는 방법이 달랐으며, 완벽한 미라를 만드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주검이 완전한 탈수 상태의 미라로 될 때까지 약 70일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관과 미라(Coffin of Thothirdes), 사카라, 기원전 791 ~ 418년(제26왕조 추정), 나무에 채색, 아마천.>

나무로 만든 관과 미라로 구성된 전형적인 이집트 미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관뚜껑>

나무에 다양한 그림과 문자가 그려진 관 뚜껑에는 죽은이가 사후세계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관뚜껑 아래쪽에 그려진 그림>


<아마천으로 시신을 감싸고 있는 미라.>

이집트인들은 죽은이의 육신을 미라 형태로 보존하면 영혼이 머물게 된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로 미라는 ‘—‘로 표기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고귀함’ 또는 ‘위엄’과 같은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미라는 영원한 삶과도 연관되어 미라로 제작된 몸은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이 미라의 주인공인 ‘토티르데스’는 관의 형태로 보아 제26왕조에 살았던 사람드로 추정됩니다. 관에는 토티르데스가 사후세계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이 그려져 있는데, 관 뚜껑 중간에는 심장의 무게를 재는 심판을 무사히 통과여 신들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여신 이시스와 네프디스가 미라가된 토티르데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고, 새의 모습을 한 토티르데스의 ‘바’가 그 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내관(Inner Cartonnage of Gautseshenu), 테베(룩소르), 기원전 700~650년(제25왕조~제26왕조), 아마천, 석고, 안료>

이집트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다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이 관의 주인공인 ‘가우트세셰누’는 ‘연꽃 꽃다발’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집트 단어 ‘seshen(연꽃)’은 훗날 ‘수잔(Susan)’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됩니다. 이 관에는 여러 신들이 그려져 있는데, 사후세계의 왕 오시리스, 죽은 이를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자칼머리를 한 아누비스, 카노푸스 단지의 주인공인 호루스의 네 아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신인 날개 달린 딱정벌레 케프리(Khepri), 활짝 편 날개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따오기 모습을 한 지식의 신 토트(Thoth)도 등장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관(Outer Sarcophagos of Paseba-Ichai-en-ipet), 테베(룩소르), 원전 1070~945년경(제21왕조), 나무에 회칠 후 채색.>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고대 이집트 미라가 모셔졌던 관이다.

<죽은이의 얼굴을 재현하고 있는 얼굴부분.>

<아래쪽에 그려진 그림>

이시스여신을 비롯하여 전형적인 이집트 신들이 그려져 있다.

제21왕조에 들어서면 무덤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그림들이 관으로 옮겨져 그려지게 됩니다. 이 관의 주인공인 ‘파세바이카이엔이페트의 관에는 다양한 신들과 그들을 숭배하는 죽인 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이는 오시리스로 묘사되어 그가 내세에 만나게 될 많은 신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관은 일부 손상되었는데, 이 부분으로 장인들이 이음판을 고정시킨 방법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장인들은 목관의 형태를 먼저 만들고 그 위에 석고를 바른 후, 채색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관, 테베(룩소르), 기원전 1339~1307년경(제18왕조), 나무에 채색>

<바닥에 그려진 그림>

이 관의 주인공은 ‘위대한 장소의 시종인 테티(Teti)’입니다. 당시 중산층에 속했던 장인들이 이런 고급스런 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략 1년치 급여에 버금가는 비싼 비용을 지불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만든 관의 가슴부분에는 양끝에 매의 머리가 있는 둥근 장식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날개를 활짝 편 대머리독수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검은색으로 표현된 자칼이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덮개(Mummy Baord), 사카라, 기원전 1295 ~ 1185년경(제19왕조), 나무에 회칠 후 채색.>

장식이나 그림이 많지 않은 관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로 만든 미라 덮개로 일상복을 입고 있는 죽은 이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주인공이 왼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생명을 상징하는 ‘앙크(ankh)’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석관 덮개(Sarcophagus Lid for Pa-di-inpu), 하르다이(키노폴리스), 기원전 305 ~ 30년경(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석회석>

이 거대한 석관 덮개는 왕실 서기이자 제사장인 ‘파디인푸’를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 이집트 상류층 중에서도 일부만이 정성스레 만들어진 석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상류층 중에서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질 낮은 나무나 흙으로 만든 관을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 수의(Mummy Shroud of Neferhotep), 테베(룩소르), 테이르 엘메디나, 기원후 100 ~ 225년, 로마시대, 아마천에 채색>

후대로 내려가면서 관뚜껑 때신 천으로 만든 수의에 비슷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이 수의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은 ‘네페르호테프’입니다. 이 초상화 수의는 나무로 된 뚜껑을 대신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1948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베르나르 브뤼예르가 발견한 것으로 당시에 이미 일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는데, 1970년대에 이를 복원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미라 수의(Mummy Shroud), 사카라, 기원전 305 ~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아마천에 채색>

프롤레마이오스시대와 로마시대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수의로 주검을 싸는 풍습이 유행하였습니다.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는 이 수의에는 중앙에 위치한 오시리스의 하반신 양 옆으로 이 수의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성과 그의 충실한 보호자인 네프티스가 서 있습니다. 경배의 표시로 한 손을 들고 있는 이 남성은 다른 손에 장례화환을 들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네스토트) 블록형 조각상(Block Statue of Nesthoth), 테베(룩소르), 카르낙 신전, 기원전 305 ~ 30년, 프롤레마이오스 시대, 섬록암>

이 조각상의 주인공 이름은 ‘네스토트’로, 이는 ‘토트(Thoth)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면에는 토트를 상징하는 개코원숭이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네스토트’가 자신의 수신인 토트에 대한 숭배를 위해 카르낙신전에 안치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인물(파디마헤스) 블록형 조각상(Block Statue of Padimahes), 레온토폴리스, 기원전 680 650년(제25왕조 ~ 제26왕조), 화강 섬록암>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파디마헤스’로, 웅크리고 앉아 팔짱을 끼고 얼굴을 들어 앞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조각상은 신전의 바닥에 놓여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과 행렬을 바라보는 ‘파디마헤스’의 모습을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인물 조각상을 신전에 모시는 이유는 자신의 영혼이 무덤에서 나와 신전에 모셔진 조각상에 들어가 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가족상(Statue of a Family Group), 사카라, 기원전 2371 ~ 2298년경(제5왕조 ~ 제6왕조), 석회석>

상류층 이상인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가족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에는 아버지가 다른 가족 구성원들보다 크게 표현되어 가부장적 사회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부인은 남편의 종아리를 붙잡고 앉아 있고, 아이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서서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 “이집트 보물전”, 2017년
  2. 위키백과,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