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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박물관] 천안의 읍지

조선시대 천안지역에는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이 있었다. 천안 삼거리는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의 분기점이었던 이 지역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교통의 요지이자 평야가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고대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고장이다. 조선시대 천안은 경제적으로는 풍요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교문화가 많이 발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름난 서원이나 고택 등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현재는 옛 직산현 관아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천안의 읍지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 천안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위해 태조산에 올라 도솔의 땅을 살펴보고 내린 이름이다. 천안시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백제시조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내려와 위례성에 도읍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천안시는 1914년 천안군으로 통합되기 이전까지 천안.목천.직산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천안은 고려시대 이후 환주, 영주, 영산군 등으로 불리다 조선 태종 때 천안으로 복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 동쪽에 위치한 목천은 백제시대에는 대목악군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대록군으로, 고려 초에는 목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목천이라 하고 현감을 두었다. 시 북쪽에 위치한 직산은 본래 삼한 목지국의 옛 터로 고구려가 취한 이후 사산현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부터 직산이라 하였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1963년 1월1일 천안읍이 발전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면서 천안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5월10일 천안시와 천안군이 통합되었고 2008년 7월 동남구와 서북구가 개청하였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영성지, 1852년,

천안군수 한여가 사족들의 협조를 얻어 편찬한 천안읍지로 건치연혁, 산천, 풍속, 인물 등 62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록지, 1817년,

1779년 안정복이 편찬한 대록지를 1817년 조국언이 중보하여 편찬한 목천현로 건치연혁, 산천, 풍속, 인물 등 41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록삼강실록, 1903년,

목천지역의 충신, 효자, 열부, 효부 등의 행적을 모아 간행한 책

한명회 묘지석, 조선 중종2년(1507)

네모난 모양의 분청사기 묘지석으로 중종반정 이듬해에 2차로 제작된 것이다. 한명회의 인적사항, 선대가계, 행적, 관로, 성풍 등의 기록되어 있으며, 찬자는 최숙생이다. 충남 공주 학봉리 가마터에서 한명회 묘지석 파편이 확인되어 공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24매이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홍진도 초상, 조선

이 초상화는 1624년 그려진 정사공신상이 아니라 18세기 전반에 작은 종이 초본의 얼굴 모습을 토대로 하여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가 특이하게 얼굴과 사모의 모사법은 17세기 초반 공신상의 전형적인 모습과 유사하지만, 신체와 관복, 교의자, 각담의 모사법은 18세기 전반 초상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정1품의 품대인 서대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홍진도가 영의정으로 추증된 이후에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17세기 공신화상을 대체하기 위해 그린 18세기 초상화의 매우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홍진도 시호완의, 1741년

시호는 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벼슬을 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의하여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이 자료는 홍진도에게 충목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로 한다는 내용의 완의로 1741년 9월 27일 사간원에서 작성한 것이다. 충목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기에 충’ 그리고 ‘덕을 베풀고 항상 정의롭게 행하였기에 목’이라 한 것이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조주부유서자필, 1636년

홍희가 아들 홍진도에게 남긴 유서를 옮겨 적은 것이다. 종가를 팔지 말 것, 조상의 신주를 종가에 보관할 것을 먼저 당부하고, 이어서 조부모와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배정한 전답과 노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로써 당시 집안이 소유한 재산을 대략 파악할 수 있는데, 동대문 밖, 남양, 수원, 용인 등 경기 일대에 산재하며 상당한 규모로 추정된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박문수 시권, 1722년,

박문수가 과거 시험을 보며 작성한 시권이다.

박문수 유지, 1728년,

영조가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에게 내린 유지이다. 박문수가 관할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올린 장계에 대해 그중 성적이 좋은 정석범에게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다.

박문수 증시교지

박문수 비문

비문, 1899년

수령관안, 18세기말,

충청도의 각 고을 수령, 찰방, 절도사, 진관 등 현황을 기록한 병풍식 책자

차정첩, 조선시대,

유학 김택수를 춘향 석전제에 집례로 선정되어 참석을 알리는 문서

천안군수 첩보

호구단자, 조선후기

준호구, 1689년 12월

관안, 조선후기

관안(官案)으로 구성된 존안류이다. 관안은 각 관서별로 현임자의 명단이다. 이러한 존안류는 편의상 기름먹인 장지에 철첩으로 장첩한 다음에 현임자의 명단을 소편지로 써서 붙여놓았고, 인사이동으로 변화가 있으면 구임자 것을 떼고 새로 부입자를 써놓는 것이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호패, 조선후기

인장, 조선후기

천안군관아 지도

천안군관아 모형

목천향교 모형

직산현 관아 모형

직산현 관아와 영소정
조선시대 직산현의 지방행정사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다. 1872년 제작된 직산현 지도에 의하면 이때까지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호서계수아문, 내삼문, 동헌, 책방 등 4동만 남아 있다. 관아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태의 건물로 호서계수아문이라는 현팜이 걸려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직산현이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의 첫번째 고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충청도읍지」에 의하면 1665년 현종이 온행 때 이곳에 이르러 작은 연못을 감상하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666년 현감 윤취은이 정자를 건립하고 송시열에게 이름을 청하니, 연못의 아름다음을 칭하여 영소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영소정은 1870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거되었지만 부왕인 현종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영소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숙종대왕의 어제시와 송시열의 직산영소정기 등 44명의 신료들의 시를 묶어 직산영소정어제서 갱화첩이 전한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천안삼거리 부근에 위치한 천안박물관

박물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안삼거리 부근

<출처>

  1.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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