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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왕이 사랑한 보물]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작센주(Frestaat Sachsen)는 독일연방공화국 동부에 위치한 주로 드레스덴이 주도이다. 동쪽으로 폴란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바에른주, 체코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14세기 신성로마제국 내 작센공국이 탄생하였으며, 17세기에는 선제후 아우구스투스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면서 작센-폴란드 연방이 성립되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프로이센과 주로 경쟁했던 강력한 세력으로 19세기초 나폴레옹과 협력하며 작센왕국이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많은 영토를 프로이센에게 잃었으며, 1차대전 이후 작센왕국은 폐지되었다.

2017년 가을 중앙박물관에서는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의 지원으로 “왕이 사랑한 보물”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전시에서는 드레스덴 지역에 있었던 작센 선제후국 궁전 등에서 소장했던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궁정을 중심으로 17~18세기에 꽃을 피웠던 바로크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작센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는 내용들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2017년 가을 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특별전 “왕이 사랑한 보물”>

드레스덴박물관연합(The Dresden State Art Collections) 소개
2010년 설립 450주년을 맞이한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연합체입니다. 회화, 조각, 귀금속공예품, 무기,도자기, 동전 등 컬렉션 별로 설립된 15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박물관 대부분이 레지덴츠 궁전, 츠빙거 궁전 알베르티눔 등 드레스덴 궁전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장품 또한 작센 공국의 선제후 베틴 가문의 컬렉션이 그대로 전해져 온 경우가 많습니다.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은 궁정의 역사와 함께 그 안에 간직된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그린볼트의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 of the Green Vault)>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심한 공습을 받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1945년 2월 공습으로 레지덴츠 궁전이 폭격당하면서, 그린볼트 보물의 방들도 훼손되었습니다. 다행히 컬렉션의 상당 부분이 폭격 직전 안전한 장소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난 뒤 드레스덴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린볼트는 구 동독 시절에는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통일 이후 복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2006년 ‘구 그린볼트박물관(Historic Green Valult)’이라는 이름으로 60여 년 만에 본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알브레히트계 베틴 가문 가계도(House of Albertine Wettin)>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재위 당시 작센과 주변국가(1721년 경)>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소규모 영방(領邦) 국가들로 존재했습니다. 164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모든 제후국의 자치권을 인정했습니다. 이후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선제후들이 각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왕이라는 이름을 내건 선제후국은 작센, 프로이센, 하노버 단 세 곳이었습니다. 작센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제후국이었습니다. 1697년 선제후 아우구스투스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면서 작센-폴란드 연방이 성립되었고, 이 연방은 아들 아우구스투스 3세가 재위한 176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강건왕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이 정점을 이룬 시기를 보여줍니다. 1721년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해의 주도권을 다툰 대북방전(1700~1721)에서 러시아가 최종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를 지원한 아우구스투스는 폴란드 국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프로이센과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8세기 바로크 예술과 드레스덴
바로크는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유럽에서 교회와 궁정을 중심으로 발달한 예술 사조를 일컫는 말입니다. 역동성과 화려함, 장엄함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 예술은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와 같은 절대 군주가 등장하면서 그 중심 무대가 교회에서 궁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궁전은 각종 공식 행사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 중심지였고, 미술, 음악, 건축 등 모든 예술은 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독일에서 바로크 예술은 30년 전쟁(1618~1648)의 피해를 극복한 18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도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은 독일 바로크 예술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버금가는 화려한 궁정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는 드레스덴에서 바로크 궁정문화를 이끈 왕이었습니다.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드레스덴으로 불러들여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물을 제작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단순히 최고의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보물을 궁전 안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그린볼트’라는, 예술품이 궁전 건축과 조화를 이룬 보물의 방이 탄생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당시 유럽 최초의 자기인 마이센 자기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여 도자기로 궁전 안을 장식하는 ‘도자기 궁전’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사랑한 보물을 만나고, 그 보물들이 살아 숨쉬는 궁전 공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719년 일본 궁정을 배경으로 열린 불꽃 축제>

강건왕 아우구스투스(Augustus the Strong)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는 작센의 선제후 가문 최초로 1697년 폴란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후 18세기 역사학자들은 그를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로 칭송했습니다. 작센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왕이 되고자 열망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선제후였던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의 왕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야심은 한 나라의 왕이 되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1719년 자신의 아들과 신성로마제국 황녀의 혼인을 성사시켜 훗날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왕이 된 뒤 아우구스투스는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왕’을 의미하는 모노그램 “AR(Augustus Rex)”을 궁전 곳곳에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드레스덴에 츠빙거 궁전과 같이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을 건설하고 각 지역의 통치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이곳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사냥 대회와 가면무도회, 연극, 오페라 공연과 같은 각종 행사를 벌였습니다. 당시의 연회는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보여준 절대 왕정의 권위를 동경하였으며, 드레스덴에서 이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루이 드 실베스트르 공방 추정, 드레스덴, 1720 ~ 1730년 경, 캔버스에 유화>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롤 불리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2세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 속의 아우구스투스는 폴란드 궁왕임을 대변하는 다양한 의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깨에 걸치 망토는 대관식 때 착용했던 예복으로 국왕으로서의 지위와 품격을 드러냅니다. 푸른색의 망토 위에는 1705년 자신이 폴란드 국왕으로서 제정한 흰독수리 훈장을 달았고, 그 아래로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황금양모기사단 훈장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대북방 전쟁에 참여한 작센이 스웨덴에 패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1706년 폴란드 국왕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작센이 지원한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1709년 그는 폴란드 국왕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아우구스투스가 폴란드 왕위를 회복한 뒤,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강건왕 아구스투스의 군복, 1700년 경, 가죽.금실.자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이 기병용 검과 매듭장식, 독일, 1733년 이전, 철에 부분도금, 은에 도금, 금과 은 직물, 비단,>

옷감 전체에 황금 자수를 놓은 이 화려한 군복은 아우구스투스가 전쟁엔서 패해 폴란드 왕위를 잃은 뒤 복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702년 작센은 대북방전쟁 중 스웨덴과의 전투엔서 패했고, 아우구스투스는 폴란드 왕위를 잃게 됩니다. 이 때 그는 후퇴하면서 입고 있던 군복과 마차를 두고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폴란드 왕위를 되찾으며 전쟁에서 빼앗긴 군복을 다시 손에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군복은 지금의 모습처럼 스웨덴 군인들이 일부를 잘라 나눠 가진 상태였습니다. 1709년 아우구스투스는 복위를 기념하는 축제에서 입을 의례용 군복을 주문하면서, 적군에게 빼앗겼던 바로 이 군복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만들 것을 지시했습니다. 새롭게 제작된 군복은 잘려진 군복과 함께 현재 무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개인적으로 소지한 기병용 검으로, 기록에 따르면 대례식 군복과 함께 그의 옷장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검에는 왕관이 있는 모노그램 “FAR”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작센의 선제후로서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와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아우구스투스 2세”를 뜻하는 두 라틴어 명칭을 합성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모노그램을 그가 알트란슈테트 조약으로 폴란드의 왕위를 내놓아야 했던 1706년부터, 러시아 표트르 1세의 승리로 폴란드 왕으로 복위한 1709년 사이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17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사망한 뒤 황제 자리가 잠시 비게 되자, 그는 황제직을 대리하는 ‘제국 고위원수’로서 이 모노그램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태양왕을 동경하다
17~18세기 유럽의 왕들은 절대군주의 위엄과 권위를 궁전에서 화려한 의식과 행사를 열어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당대 유럽의 왕들이 본받고자 했던 왕은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였습니다. 루이14세가즐겨 변장했던 태양신 아폴론과 헤라클레스,로마 황제의 모습은 이후 유럽의 절대 군주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루이 14세를 동경한 아우구스투스도 이러한 이미지를 중요 행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가면무도회에서 태야인으로 분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관식 행렬에 사용된 말을 작은 태양 모티프로 장식했습니다. 아울러 그림이나 조각에서 스스로를 로마황제나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태양신과 로마 황제의 모습은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원한 절대군주의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의 생김새를 본 뜬 태양 가면, 요한 멜히오르 딩글링거, 드레스덴, 1709년, 동에 도금>

이 태양 가면은 1709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폴란드왕으로 복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를 초청하여 벌인 ‘신들의 행렬’ 행사에서 착용한 것입니다. 밤에 펼쳐진 이 연회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태양신 아폴론으로 분장한 ‘밤의 발레’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또한 자신의 생김새를 본 뜬 이 태양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이 아폴론의 화신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태양신의 이미지는 태양왕과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는 절대군조로서의 이미지를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흉상, 요한 크리스티안 키르히너, 드레스덴, 1712~1714년 경, 테라코타.대리석>

이 흉상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비늘 갑옷을 차려입은 로마 황제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얼굴에 드러나는 강건한 인상은 헤라클레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로마 황제와 헤라클레스의 모습은 이 작은 조각상에 절대군주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힘을 불어 넣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8세기 유럽이 사냥무기
사냥은 전쟁 연습의 일환이자 고기를 마련하는 수단이었지만, 15~16세기 귀족과 상류사회 남성들의 스포츠 활동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석궁은 16세기를 거치면서 화약 무기인 소총에 자리를 내어 주고 전장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사냥과 사격 시합에서는 여전히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사냥용 칼은 상처를 입은 동물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거나 잡은 사냥감을 해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해체용 칼의 칼집에는 고기의 절단이나 가죽의 제거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작은 칼 여러 개와 작은 톱, 줄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바퀴식과 부싯돌식 소총도 사냥에 이용되었습니다. 상류 계층이 사용한 사냥용 무기는 정교하게 장식된 것이 많았는데, 이는 소유주의 지위와 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고급 사냥용 무기의 제조는 17~18세기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도 금, 은, 상아, 황동, 자개와 같은 고급 재료로 화려하게 만든 사냥용 무기를 사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부싯돌식 소총과 바퀴식 소송, 18세기 전반, 철.황동.금으로 상감.호두나무.은입사>

15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유럽에서는 사냥이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활동이자 특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사냥에 사용된 각종 도구들도 귀한 재료들을 이용해 화려하게 장식하여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 소총들은 총기를 비롯해 스포츠 활동이나 사냥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던 아우구스투스 3세의 창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총신이 두꺼운 위쪽 두 점은 멧돼지나 사슴 등 몸집이 큰 야생 동물을 잡기 위한 산탄총입니다. 총신을 매우 정밀하게 만들었고 화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적중률이 높아 과녁 맞추기 같은 스포츠 활동에도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총신이 길고 얇은 한 점은 몸집이 작은 동물을 잡기 위한 쌍발식 소총입니다. 부식이 잘 되지 않도록 처리한 튼튼한 총신을 갖추고 황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바퀴식 또는 부싯돌식 사냥용 소총은 당시 선제후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석궁, 시위 걸이용 지렛대,>

<화살 보관함으로 구성된 스포츠용 석궁 세트, 게오르크 에셔, 드레스덴, 1719년, 강철.흑단.귀갑.자개.철에 도금. 옻칠.금칠.가죽>

이 석궁 세트는 드레스덴 궁전 건축가 마테우스 다니엘 푀밸만이 강건왕 아우구스투의아들 아우구스투스 3세에게 선물로 바친 것입니다. 이 시기 석궁은 과녁 맞추기 같은 스포츠 활동에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석궁의 활대는 단단한 쇠로 만들었고, 흑단목으로 만든 석궁 몸체는 귀갑과 자개로 상감하여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시위를 손으로 당겨 감기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에 시위 걸이용 지렛대를 이용했습니다. 지렛대의 짧은 다리 부분에는 귀갑과 자개를 이용해 작센 공국의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다양한 색상의 목재나 황동, 귀갑과 같은 재료로 바깥 면을 상감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상자 안에는, 화살 외에도 과녁 맞추기 활동에 필요한 점수 기록판, 망원경 등의 도구들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영국식 안장, 18세기 전반, 가죽.나무.벨벳.비단,렌데>

<2. 영국식 사냥용 말채찍, 터키, 1733년 이전, 은천.가죽.연옥.금.다이아몬드.등나무 줄기>

당시 유럽에서는 말을 타고 사냥개들과 함께 사냥감을 쫓는 영국식 사냥이널리 퍼졌습니다. 채찍은 연옥으로 만든 손잡이에 아라베스크 무늬를 금으로 상감하는 동양적인 요소를 띠고 있어 터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손잡이 끝 둥근 부분에 다아아몬드를 나란히 박아 넣은 것은 당시 유럽인의 취향에 부합되는 요소입니다. 당시 독일에서 유행한 영국신 안장의 형태는 말을 타고 사냥개와 함께 사냥감을 쫓는 영국식 사냥의 도특한 승마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빠른 전진과 구보, 장애물 넘기를 할 때 말을 탄 사람이 쉽게 몸을 앞으로 기울일 수 있고 말을 효과적으로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독일에서 개를 이용한 사냥이 확산되면서 군주들은 이러한 모양의 안장을 애호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4. 강건왕 아우구스투스의 사냥도구, 1730년 이전, 철에 부분도금.황동.가죽>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소장했던 사냥용 칼입니다. 오른쪽의 칼은 왕이 사냥으로 잡은 사슴의 마지막 숨을 끊는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상아로 만든 손잡이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목신 판을 조각하였습니다. 사냥감을 해체하는 데 사용된 왼쪽 칼의 칼집에는 작센 공국의 문장이, 칼날 아래쪽에는 아우구스투스 왕을 의미하는 모노그램 “AR”이 새겨져 있습니다. 칼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타이온의 이야기가 묘사되었습니다. 사냥 중이던 악타이온에게 목욕하는 모습을 들킨 사냥의 신 아프테미스가 그를 사슴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칼 손잡이에은 사슴이 된 악타이온이 자신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 장면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7년
  2. 위키피디아,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