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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박물관] 승보사찰 송광사

순천 송광사(사적)는 수행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수행도량으로 승보사찰로 불리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창건되기는 했으나 그 위상이 높지는 않았다. 고려중기 무신정권 때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개혁운동인 정혜결사 중심 도량이 되면서 한국불교에 중요한 사찰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광사는 12국사를 모신 국사전를 중심으로 한 수행공간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는 등 다른 사찰에 비해 수행공간의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고려말 송광사의 위상과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해오고 있다.

송광사의 창건
송광사는 통일신라 말 혜린선사께서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때 보조국사께서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정혜결사 도량으로 송광사를 택하신 뒤 총16분의 국사스님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로 들어와 부휴선수 스님과 제자들이 머무르시면서 승보사찰의 전통을 이어왔다. 근래에는 효봉, 구산 스님이 그 전통을 이어 한국정신 사상사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1969년 종합 수도도량인 총림이 된 송광사는 선원, 강원, 율원 등의 기관에서 스님이 상주하며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의 이름 유래
송광(松廣)의 이름 유래는 송광산의 이름에서부터 전해진다. 조계산의 원래 이름은 송광산인데 예부터 몇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이 산에서 장차 <十八公(18명이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산>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했다는 것이다. 송(松)자를 十八公이라고 풀이하고, 광자는 ‘부처님 말씀을 널리 펼치다’의 뜻으로 해석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송광의 뜻을 보조국사의 나무 매 전설에서 따와 솔갱이라고 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에 소나무가 가득해 있는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수선사형지기(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 고려, 보물

유물을 통해 본 수선사
수선사형지기는 사천대(고려시대 관청의 하나)의 관리가 기록한 문서로 수선사의 창건연혁 및 가람이 배치상황, 불상과 건물의 현상, 보조국사 비문, 승려수, 재산목록과 함께 제위보이 내용과 규모, 예식보시, 전답.시지.염전.산전의 규모, 노비의 수 등을 기록한 등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사찰의 규모와 건축 상황 및 재산상태 등을 규명하기에 좋은 자료로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갖추었던 수선사의 경제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특유의 관리문서형식을 함께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비문서와 함께 보물 제572호로 지정된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노비문서, 고려, 보물

1281년 작성된 노비문서이다. 수선사의 주지였던 원오국사가 아버지인 양택춘으로 받은 노비를 당시 사찰에 봉안한 거란본 대장경을 관리할 수 있도록 관에서 인증한 문서이다. 세속인인 부친이 출가한 자식에게 노비를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례적인 문서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주지 임명장, 조선 1825년


송광사 주지계보, 일제강점기 1921년

불.법.승 삼보사찰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를 삼보라고 한다. 그 세가지는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승가이다. 이는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요소로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이 보배를 간직하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이라고 한다. 곧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 부처님의 가르침인 대장경이 봉안된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한국 불교이 승맥을 잇고 있는 송광사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전도

송광사 전도는 근현대 불교미술의 거장 금용일섭 스님이 그린 송광사 전각배치도로, 1961년에 한국전쟁 이전의 송광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송광사 경내 전각들 뿐만 아니라 산내 암자까지 그려져 있어 당시 송광사 가람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그림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의 가람배치
가람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사부대중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의 범어인 승가람마의 준말로, 가람배치는 사찰의 건물배치를 뜻한다. 송광사의 청건 초기에는 금당 앞의 마당을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행랑으로 둘러싸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삼국시대부터의 전통적인 평지 가람형식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산지사찰이면서 평지 가람적인 배치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송광사의 공간 구성상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송광사의 역사 기록인 『수선사형지기』, 『조계산수선사중창기』 등의 문서와 <불일보조국사비명>에 기록된 건물 명칭을 통하여 배치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송광사의 가람배치는 화엄일승법계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 사중에서는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210자 7언시를 도식화한 것으로 『국사전중창상량명변서』, 『해청당중수기』 등이 기록을 통해 송광사의 건물배치와 요사채의 명칭이 법계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1930년대 가람배치 (모형)

여덟 번에 거친 중창과 중수 과정 속에서 송광사의 가람배치도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쳤다. 제 5.6차 중창 이후 송광사의 가람배치는 『조계산송광사사고』 「건물부」와 유리건판 사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42년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과 승방 2,152칸이 소실됐다. 이후 용운화상이 주도로 14년간 복구하여 제5차 중창을 완료하였고, 그 이후 1922년에서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을 전체적으로 중수하여 1930년대이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다. 대웅전을 전면으로 법왕문, 종고루, 대장전, 해탈문 등의 문루로 중심축을 형성하여 대웅전의 좌우로 명부전과 대지전이 위치하고, 전각의 전면으로 각각 심검당, 용화당 및 창고, 보제당 등의 건물을 배치했다. 이후 한국전쟁과 여순사건 등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취봉스님과 구산스님이 대웅전, 명부전, 응향각 등을 중창하고 종고루와 박물관을 새롭게 조성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현재의 가람배치

현재의 송광사 가람배치는 1983년부터 1990년까지 이루어졌던 제8차 중창을 통해 구성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하단.중단.상단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하단에는 일주문을 포함해 우화각과 사천왕문, 화엄전 지역의 요사공간이 있다. 중단에는 범종각을 시작으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신행구역이다. 가장 높은 상단에 스님들의 선방과 선원, 고승 진영을 모신 풍암영각과 16국사 진영을 모신 국사전이 위치해 있어 가람배치에도 승보사찰의 특성이 드러난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봉산제도와 사찰림 관리
봉산(封山)은 조선시대 특정 산을 지정.국가 수요의 임산물 공급을 위하여 민간의 이용을 제한.금지한 제도를 말한다. 그 목적에 따라 황장봉산-왕실의 관 제작용, 선재봉산-선박제조용, 율목봉산-신주제작용, 향탄봉산-능묘 제사용 향목.목탄 제조용 등으로 나뉜다. 왕실에서는 사찰에 봉산보호의 책무를 부여하는 대신 사찰의 부역과 잡역 등을 감면해 주기도 했다. 송광사에는 1830년 율목봉산과 1900년 향탄 봉산이 내려졌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향탄봉산별순행금송패, 대한제국 1900년, 송광사 총섭패, 조선 1830년

조계산 송광사사고 산림부, 일제강점기

조계산 송광사사고 산림부
『조계산 송광사사고』「산림부」에는 1830년부터 1929년까지 100년 동안 사찰림 관리에 관련하여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의 지정과정과 운영방법, 밤나무와 소나무의 벌채 및 운반방법, 이웃 선암사와의 산림경계분쟁에 대한 5년간의 송사 내용,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불복신청과정, 1927년과 1929년에 작성된 산림시업안 등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