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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과 정약용 유적(사적)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적(사적)이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유서깊은 곳으로 그가 이곳에서 초가를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다산초당’이라 부른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윤두서의 손자 윤단의 정자가 있던 곳으로 정약용의 외가 해남윤씨 집안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저술활동과 후학양성을 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를 여유당전서라 부르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술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무너져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그 양쪽에 제자들과 손님이 머물렀던 동암과 서암이 있다. 유적지에는 그가 직접깎은 ‘정석(丁石)’이라 적힌 각석이, 차를 달여 마셨던 ‘청석’과 작은 샘물인 ‘약천’, 그가 잉어를 길렀다는 작은 연못 등이 있다. 천일각이라 적힌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가 태어나 살았던 여유당 고택 뒷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 경치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중기 백련결사운동의 중심 사찰이었던 백련사가 초당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는 백련사를 찾아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강진 정약용 유적지를 대표하는 다산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었던 건물터에 해방 이후 전형적인 목조건물로 다시 지었다. 향후 초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 입구에 있는 귤동마을>

<유적지 입구>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300 m 정도 걸으면 다산초당을 찾을 수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약 500 m 정도 떨어져 있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숲길>

<다산초당 입구>

<다산 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던 곳에 새로지은 건물이다.

<서암>

윤종기 등 정약용을 따르던 18명의 제자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다산초당과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동암(東庵)>

  저술에 필요한 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다산초당 뒷편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라 적힌 각석>

유배생활동안 그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필체에서 단정하고 간결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이 잘 구현된 연못이다.

연지석가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하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약천>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촉촉히 젖어 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다산초당 앞 마당에 있는 청석>

그가 차를 끓여 마셨던 곳이라 한다.

옛부터 있던 돌을 부뚜막으로 삼아 청동의 화로에 약천의 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반석으로 저술로 침침해진 눈과 피로한 몸을 돌보던 곳.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다산초당 근처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천일각.>

<천일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생가터가 있는 남양주 여유당 고택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고향과 가족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서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으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자료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천일각에서 백련사로 가는 약 1 km에 이르는 길>

울창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강진 백련사>

고려중기 불교개혁 백련결사가 일어났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정약용은 이곳을 자주 찾아 혜장선사와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설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백련사 동백나무숲 입구>

<동백나무 숲길>

<울창한 동백나무숲>

<해남 윤선도 종택 녹우당>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일대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 불린다.  윤선도와 자화상으로 유명한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 가 살았던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해남윤씨 집안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지주집안이었다. 다산초당에서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외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유배지를 강진으로 정했던 곳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형 정약전은 연고가 거의 없었던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크게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양주 여유당 고택>

경치가 아름다운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정다산 유적, 사적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