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창주서원(滄州書院)이다. 조선중기 명종 때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 노진을 모신 서원이다. 선조 12년(1579)에 고령서원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선조 33(1600)에 ‘창주’라는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59년 현재 위치에 새로 지어졌다. 사당, 강당, 동.서재 등을 갖추고 있으나 교육중심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조상들을 모시기 위한 제향 중심의 서원이다.
노진(1518~1578년)은 유학자 정여창을 배출한 함양 개평마을 출신으로 조선중기 명종 때 활동한 관리이자 학자이다. 관리로서 형조참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고루 역임하였으며, 유학자 기대승, 김인후 등과 교류하는 등 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다. 남원 창주서원과 함양 당주서원에 모셔졌다.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노신을 모신 곳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복원한 서원이다.
<창주서원 출입문>
<강학공간 중심공간인 강당>
<동재>
<서재>
<사당 출입문>
<사당인 명덕사>
창주서원, 전북 남원시 도통동
본 서원은 조선중기의 문신 노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곳으로 조선 선조12년(1579)에 남원시 금지면 고룡서원으로 창건, 선조 33년 (1600)에 창주서원으로 사액되어 300여년간 천향하여 왔으나 고종8년(1871)에 조령으로 훼철되어 사림과 자손들의 회한이 애절하던 중 1964년에 현위치에 복설하였다. 선생은 중종 13년(1518) 경남 함양군 개평에서 태어나 선조 11년(1578) 61세로 졸하였다. 선생의 자는 자응, 호는 옥계, 시호는 문효이고 관향은 풍천이다. 관직은 충청, 경상도 관찰사, 전주부윤,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577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세칭 학문은 도학연원이 백세표준이 되고 덕행에 효제와 청빈은 역대의 으뜸이라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창주서원 경내에는 명덕사, 도남당, 동재, 서재, 진덕문이 있고 저서로는 옥계문집 11권 6책이 현존해 있으며 유적으로는 남원에 별묘, 경남 함양의 묘소에 신도비, 사액당주서원 터에 유허지비, 지곡에 효자정려문, 상림역사인물 공원에 흉상, 지곡연지원에 어제시비 등이 있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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