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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유적, 농경의례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동시대 한반도 다른 지역 유적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행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점을 치던 행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점뼈를 비롯하여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토제품 등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는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악기들이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당시에 사용된 악기로는 나무로 만든 현악기와 토기로 만든 북 등이 있는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악기들을 실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고대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점을 치는 방법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칠기검집, 초기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는 것으로 석검을 비롯한 모든 검의 부속구로 딸려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북,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한반도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

바닥면이 좁고 아가리가 넓은 대접과 비슷한 형태로 북으로 추정된다. 아가리를 따라 가죽을 덮고, 구멍을 통해 가죽을 고정하였다고 판단되며 장고의 한쪽 부분과 유사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북, 복원품


현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현을 타거나 켜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경산 임당 무덤에서 유사한 형태의 칠흔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찰음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마찰봉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긴 나무막대의 한쪽 부분은 손잡이로 하고 다른 쪽은 여러 개의 홈을 판 형태로 만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찰음악기, 복원품

농경의례와 악기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악기는 유럽의 구석기시대 뼈로 만든 피리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뼈피리가 최초의 실물 악기에 해당된다. 악기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뼈를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쉽게 부식되어 많이 확인되지 않지만, 청동제 악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청동방울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청동방울로 령과 탁의 종류가 있으며, 타악기인 북과 현악기인 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방울은 여러 유적에 확인되었지만, 슬과 같은 현악기와 북은 신창동 유적에서 처음 실물로 확인되었으며, 이와 함꼐 찰음악기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악기는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파종과 수확을 비롯한 다양한 의례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검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목검과 부속구,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 제품은 검집과 목검검 손잡이검 손잡이 끝장식 등으로 구성된다. 결합된 전체 형태는 청동검의 형태를 닮아 있는데, 이는 청동검을 대신하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원판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편을 갈아 둥글게 만든 것이다.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 이래 제사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멧돼지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멧돼지의 형상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주둥이 일부만 남아 있다. 유아의 장난감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적의 성격, 점뼈와 함께 출토되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소형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굽다리접시, 뚜껑, 국자 등의 형태로 작게 만든 토제품이다. 저습지 주변에서 다양한 의례 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물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농경의례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 섰다가 하면서 손발로는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이 마치 탁무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면 또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고 국읍에 한사람씩을 받들어 천신의 제사를 주재토록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각국에는 각각 별읍이 있는데 소도라 부른다. 방울과 북이 매달린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긴다. 그 가운데로 도망 오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븐 점은 다르다. ”
이 기록은 파종시기와 수확시기에 농경의례를 행하고, 농경의례와 관련된 소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도는 농경의례의 하나인 제천의식을 의미하거나 농경의례를 행하던 장소로 보기도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얼굴모양방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흙으로 만든 작은 크기의 방울과 그 위에 얼굴모양을 새긴 유물이다. 다양한 의례행위가 이루어질 때, 청동방울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바람개비문양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앞면 중앙에 회전하는 바람개비 문양, 가장자리를 따라 톱니날 문양을 배치하였다. 앞면에 옻칠을 한 뒤 문양 이외의 부분을 파내어 문양이 돋보이게 하는 박지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새모양목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나무를 깎아 새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저습지 주변의 농업과 관련된 의례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농경의례
농경의례는 농작물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거나 수확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행위이다. 마을을 형성하게 되고,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작업이 반드시 요구되었기에 농경의례는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통합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농경의례는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이 시기 전국으로 확산되는 도작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농경의례 모습의 구체적인 유물로는 농경문청동기가 대표적이다. 이왜에 새문양청동기, 손잡이에 새가 장식된 청동검 등 농경의례 관련 자료에는 새가 많이 보인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 새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넘나들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 점뼈와 소형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새와 태양을 표현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000년 전 동북아시아 교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대방에서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의 연안물길로서 한의 나라를 경유하며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구사한국(김해)에 도착한다. 여기까지가 칠천여리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과 대방에서 서해와 남해의 연안을 따라 김해에 이르고 다시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규슈에 이르는 당시 동방교역로를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방교역로상에 위치한 영산강 하구와 영산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이어진 신창동 일대는 낙랑 및 중국, 한반도, 왜를 연결하는 중요 기착지로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남해안 도서 및 해안을 면한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왜래유물들은 기록에서 보이는 중국(대방)-한-왜를 잇는 동방교역로를 실증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