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사회에서 전라도는 변혁을 추구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조선중기 율곡의 제자였던 정여립은 당쟁에 휘말려 낙향하여 대동계를 만들어 변화를 추구하다 반역으로 몰려 많은 희생을 내었다. 이후 구한말에는 동학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변화를 꿈꾸는 많은 신흥종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반면 임진왜란에는 국가적인 위기에 맞서 적극적으로 의병활동 등에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 직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최익현과 전라도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외세에 대항하였다.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은 윤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이에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제도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사회 속에서 중국의 『예기』에 등장하는 이상사회인 대동세상의 실현을 꿈꾸는 이가 전라도에서 등장하였습니다. 대동의 의미는 해석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신분질서를 부정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전라도는 ‘반역향’의 이미지를 버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예기, 예기집설대전, 조선

기축록, 조선후기.

『대동야승』에 실린 「기축록」을 참고하여 필사한 책으로, 기축옥사 및 이와 관련된 일려는 사건을 기록하여 광해군에서 인조 연간에 이르는 당쟁 분열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송강 정철 청화백자묘지, 1706년

송시열이 지은 정철의 청화백자 묘지명이다. 고인을 애도하고 공덕을 기리는 것 이외에 정여립의 모반으로 인해 일어난 기축옥사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철의 일생뿐만 아니라 16세기 말 사림 붕당 간의 갈등 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백세보중, 조선

송강집, 조선

송강집 목판, 조선

송강서원 현판, 1706년

정여립과 기축옥사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1546~1589)은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 벼슬길에 나섰으나 갖은 당파의 분쟁에 휘말려 결국은 낙향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진안의 죽도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얽매이지 않는 모임인 대동계를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여기에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것이 모반으로 여겨져 반역자로 쫓기다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모반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인 기축옥사를 불러왔고, 3년 넘는 세월 동안 1000여 명이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사발통문, 1893년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
189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에는 전봉준 외에도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각지의 접주들이 이끄는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나열할 때, 누구의 이름도 앞서지 않도록 사발을 대고 원을 그려 둥글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책임자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그들 누구도 다른 이의 위에 서지 않는, 평등한 사람들의 무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천안 전씨 세보, 1862년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이고 본명은 명숙인데 1862년에 간행된 『천안전씨세보』에는 ‘철로’로 명기되어 있다. 사진은 1895년 2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될 때, 일본의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밀양손씨 세보

손화중(1861~1895)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정식이다. 그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의 배꼽에서 신라 검단대사의 비밀 문서를 꺼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어서 그의 밑으로 더욱 많은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도강김씨 족보

김개남(1853~1894)은 전봉준과 함께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본관은 도강이고 본명은 영주이며 태인 출신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함평갈동 명록, 1894년, 명록, 1893년,

나주명록, 1894년

천일권 집강 임명장, 1894년

김창모 교수 임명장, 1894년

다시 사람이 하늘인 세상
물산에 부족함이 없던 비옥한 땅, 전라도는 예로부터 지배층의 수탈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19세기말,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며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자 전라도에 대한 수탈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폐악에 불만을 품은 전라도 농민들은, 1894년 동학의 접주 전봉준의 깃발 아래 모여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인내천’, 즉 사람이 하늘인 세상에서 살고자 꿈꾼 전라도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인종어제, 인종(재위 1544~1545), 조선


인종대왕묵죽도, 인종, 1543년

조선전기 호남사림과 하서 김인후
하서 긴인후(1510~1560)는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입니다. 그는 인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필암서원의 많은 문서가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반계수록, 유형원, 1770년

경세유표, 정약용, 조선 19세기

목민심서, 정약용, 조선 19세기

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중이던 1810년에 부인 홍혜완이 보내온 붉은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전할 글귀를 적어 서첩으로 만든 것으로, 본래 4첩이었으나 지금은 3첩만 전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흠흠신서, 정약용, 조선 19ㅔ기

자승차도해, 하백원, 1810년

운해(초고본), 개합사장(초고본), 신경준, 1750년 이전

이재난고, 황윤석, 조선

환영지, 위백규, 1822년

다산 정약용과 호남의 실학자들
16세기 두번의 큰 전쟁이 끝나고 나자 대의명분과 절의는 유학자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돌볼 수 있는 실용적인 사상, 실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 활약한 실학자로는 강진에 오랫동안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 이전에 반계 유형원(1622~1836)과 호남 4대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 존재 위백규(1729~1798), 이재 황윤석(1729~1791), 규남 하백원(1781~1844) 등이 있었습니다.


최제우 초상

동경대전, 최제우, 1883년,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가 저술하기 시작하여 2대 최시형이 1880년에 완성.간행한 한문경전이다. 동학은 이밖에도 한글경전인 용담유사를 기본 경전으로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용담유사, 최제우, 1883년

보천교 교포, 1950년, 대순전경, 1929년, 이사전선, 1885년

대도지남

불교정전 권 1~3, 1943년


강일순 초상

신종교의 창시자들
동학농민운동은 본래 1894년 새로운 종교의 교조였던 최제우(1824~1864)의 신원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종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이어 혁명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동학이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많았던 전라도에서는 그만큼 새로운 종교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동학에서 파생한 손병희의 천도교, 강일순의 증산교, 그리고 지금도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박중빈의 원불교 등이 대표적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최익현 초상

면암집, 최익현, 1908년,

면암 최익현의 시문집으로 최익현이 일본 쓰시마 섬에서 순국한 뒤에 간행되었다.

돈헌유고, 임병찬, 1957년

최익현과 임병찬(1851~1916)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체결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태인에서 1천여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순절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들의 깃발 아래로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1천여 명의 전라도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결국 이땅을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결집된 전라도 사람들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특히 최익현 등이 전라도 유생들을 이끌고 항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의병들은 이제 독립군이 되어 싸웠습니다. 농민혁명군에서 의병으로, 다시 독립군으로 변하는 동안, 그들이 지켜낸 것은 결국 그들의 삶의 터전인 이 땅 전라도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심춘순례, 최남선, 유서석록, 고경명(1533~1592)

금산사도

매월당시사유록, 조선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
전라도 천년의 역사동안 이 땅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지난 세기 동안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혹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주의를 위한 열사로서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거친 전장으로 나아간 이들이지만, ‘기쁘게 늙은 매화.서끈 대나무.아름다운 난초가 있고, 귤과 유자가 익는 가을, 비자나무와 동백이 푸른 겨울’이 장관인 전라도에서 살아온 그들은 이땅을 닮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