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옛 청룡사 절터이다. 청룡사는 고려말 활동했던 승려 보각국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그가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국사’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승탑 이름을 하사하고 청룡사를 크게 중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실과 관련된 사찰로 조선후기 숙종 이후까지 큰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조형미와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를 비롯하여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절터 입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사찰을 크게 중건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위전비가 남아 있어 청룡사가 조선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룡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하는 등 조선왕실과 관련이 있었던 사찰이지만 조선후기 폐사된 이후 보각국사와 관련된 유물 외에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위전비.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민들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그 경위를 기록해 놓고 있다.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위전비에 새겨진 글. 청룡사를 중창할 때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등을 새겨놓고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2 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에는 보각국사가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 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철터 안쪽에 있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년)는 고려말 활동한 승려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젊었을때는 청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전국을 돌며 수도하다가 이곳 청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이름은 ‘정혜원륭(定慧圓融)’이다.
보각국사탑(국보197호). 정식 명칭은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이다. 탑은 8각형평면을 기본으로 하고있는데, 기단 아랫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받침돌에는 사자상과 용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 몸돌에는 각면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탑신 몸돌에 새겨 넣은 신장상과 그 사이에 구름에 휩싸인 용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새겨 놓고 있다.
보각국사탑 앞에 세워진 석등(보물 656호). 높이 2.03 m로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가운데받침돌은 4각형이며,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은 4각형 형태로 앞뒤로 창을 내어 놓고 있다.
보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보물 658호).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승려 희달이 세운 것으로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필체가 힘이 넘치며 격조를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뒷편에서 본 모습. 절터는 폐사된 후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기는 쉽지 않다.
고려말 청룡사에서 간행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보물 720-2호)』. 『금강반야경』의 주석서로서 발문에 따르면 1376년 보각국사의 설법을 듣고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