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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고려실3] 원의 간섭과 새로운 모색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고려는 80여년간의 원나라 간섭기를 보낸다. 몽골과의 투쟁, 일본 원정 등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고려시대 원의 간섭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유물로는 금속활자와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 유사를 들 수 있고,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온 성리학 또한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왕을 모시면서 오랜 기간 머물렀던 관료이자 학자인 안향.백이정 등이 관련 서적을 국내에 소개하였고,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 간 이제현이 중국의 성리학자들과 학문적이 교류를 하면서 많은 학문적인 깊이를 더했다고 한다. 당시 초강대국 원나라를 중심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때문에 원나라 간섭하의 고려정권이었지만, 큰 영향을 미친 많은 학문적.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고려군의 복식,

고려군(왼쪽)은 옆드림 부분에 털을 댄 투구와 검은 군화를 착용하였다.

몽골군의 복식,

몽골군(오른쪽)은 목 앞을 가리는 투구와 무늬가 있는 꽉 끼는 군화를 착용하였다.

일본군의 복식

고려.원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그린 그림,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 복제품.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의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작성한 것으로,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이다. 다케자키 스에나가의 활약상을 부각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 자료로서의 한계는 있지만, 당시 전투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전술과 무기, 복식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 (백운화상초록불직지심체요절,복제품), 고려 우왕 3년(1377),

『직지』가 알려지기까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세기말~20세기 초에 주한 프랑스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콜랭드 플랑시Collin de Plancy(1853~1922)가 수집하였다. 1900년에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전시되고 1902년에 프랑스의 학자 모리스쿠랑Maurice Courant이 『한국서지 La Bibliographie Coreenne』의 제4책 부록에 수록하기도 하였지만 『직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11년 플랑시의 물품 경매때에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y Vever에 소유권이 넘어간 『직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조선활자인쇄자료전관목록』에도 소개되었으나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서고에 묻혀 있던 『직지』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이 도서관 특별보조원으로 일하던 서지학자 故박병선이 그해 이 도서관에서 개최된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유네스코 후원)에 『직지』를 고려의 금속활자본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후 관련 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이어지면서 『직지』는 명실상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될 수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실물 금속활자, 고려, 전 개성출토,

개성지역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 실물 금속활자이다. 활자 꼴이 가지런하지 않고 활자 네 변의 길이가 앞뒤로 차이가 있다. 뒷면이 타원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는데, 이는 구리의 소비량을 줄이는 단계로 개량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비록 주조 방법이 서툴지만, 고려 금속활자의 주조와 조판 기술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실물 자료이다. 고려 금속활자의 실물은 이것 외에도 북한 개성박물관(개성시 옛 성균관 건물)에 한 점이 더 소장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활자 인쇄
고려인들은 불교문화의 융성 속에서 목판인쇄를 크게 발달시키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일찍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인쇄함으로써 세계 인쇄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직지直旨』로 널리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는 그것이 1377년에 청주의 흥덕사興德寺라는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책의 말미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직지』보다 훨씬 앞선,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고종19년, 1232) 이전 시기부터 이미 개발.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금속활자본을 번각飜刻 인쇄한 목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책의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아울러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강화도 천도 시절에 무신정권이 『상정예문詳定禮文』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한 사실도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삼국과 통일신라에 대한 기록들에서 빠진 부분을 모은책, 삼국유사, 일제강점기, 1904년,

고려후기 선승 일연(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 무렵에 엮은 책으로,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등 기존의 문헌들이 기록하지 못한 설화, 불교 관계 기사 등을 널리 모아 정리하였다. 『제왕운기』와 함께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의 많은 부분을 밝히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전시 중인 책은 대한제국기에 인쇄한 판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제왕운기帝王韻紀』 중에서
요동에 따로 한 세상이 있으니,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러싸고, 북쪽으로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
가운데 사방천리 여기가 조선(고조선)이니, 강산의 뛰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 높네.
농사지어 먹고 살고 우물 파서 물마시는 예의바른 나라이게에 중국사람들도 소중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었던가? 석제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일세.
요임금과 나란히 무진년에 일어나 순임금을 거쳐 하나라때까지 왕위에 계시다가, 은나라 무정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셨으니 나라를 누린 것이 1,038년이라. 그 조화는 상제이신 환인이 전한 일 아니던가?

『삼국유사』중에서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경經에는 무엽산이라고도 하고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이른 것이다>의 서자 환웅ㅇ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을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가히 세상을 널리 이롭게<홍익인간> 할 만하므로,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내려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태백은 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고 부르니 이 분을 환웅천황이라고 한다.”라 하였다.


딸을 공녀로 바친 왕족 부인의 묘지명, 고려 충숙왕 복위 4년(1335),

고려 왕족의 부인 수령옹주의 묘지이다. 수령옹주는 14살에 왕온과 혼인했으나 29살에 남편을 여의고 3남 1녀를 홀로 키웠다. 그러던 중 고명딸을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게 되자 그 슬픔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묘지명에 ‘현왕’, ‘문왕’ 등 고려의 왕을 가리키는 말보다 ‘세조’, ‘천자’, ‘조’ 등 원나라 황제와 관련된 용어를 한 단 위에 새겨 원 간섭기 두나라의 위계 관계를 표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공녀貢女
충렬왕1년(1275) 10명의 고려 여성을 원나라에 보낸 이래 공민왕 대에 이르기까지 약80년 간 처녀진공사의 왕래가 50회를 넘었다. 공녀의 대상은 대개 13살~16살의 미혼 여성으로, 평민은 물론이고 왕족의 여성도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났고, 고려 조정은 아예 금혼령을 내리거나 결혼도감.과부처녀추고도감 등을 설치하여 공녀의 안정적 차출을 꾀하였다.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은 원나라 황실의 궁녀, 고관들의 시첩.시비 등에 충당되거나 군인들과 집단 혼인을 하기도 하였다. 고관과 혼인한 예도 있고, 드물게는 원나라 호아제와 혼인하기도 하였다. 원나라 인종의 편비였다가 후에 황후가 된 관리 김심의 딸이나, 나중에 순제의 제2황후로서 황태자까지 낳은, 관리 기자오의 딸 기황후라 불리는 이가 그러하다. 기황후의 일족은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다가 공민왕 때에 숙청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상감 국화무늬 편호, 고려 13~14세기, 개성 출토, 금으로 무늬를 장식한 청자 국화무늬 잔, 고려 13세기,

상감된 국화무늬 주위에 금으로 장식한 흔적이 남아 있는 청자 잔이다. 『고려사』에 금으로 채색한 옹기나 화금자기를 진생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금자기는 대체로 13세기 후반 경 원나라 헌상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금자기란 상감문양주변에 금채를 입혀 화려하게 장식한 자기를 말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가루를 입힌 청자 편호(청자상감 금채수하원문 편호), 13세기말,

개성 고려 궁궐터 출토, 개성의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에서 출토된 화금자기이다. 화금자기란 그릇을 구워낸 다음 유약 위에다 상감 문양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금채를 입혀 화려하게 장식한 자기를 말한다. 금채를 입힐 때는 강력한 접착제를 써서 금분을 발라 나중에 금분이 떨어지더라도 접착제 자국이 남았다. 이런 화금자기는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던 13세기 말에도 제작되어 원나라에 헌상되곤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지흑화 구름 용무늬 병, 흑유 병, 원元, 개성 출토

황유 칠보무늬 대야, 원元, 개성 출토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 원元, 개성 출토


원나라 불교계에서 준 티베트문 문서(법지), 복제품, 보물, 고려 1275~1308년, 송광사 소장,

원나라 불교계에서 작성하여 준 문서로 일종의 통행증이나 특혜문서로 추정된다. 당시 원나라의 일반적인 공문서처럼 티베트 문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그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두 나라의 불교계 교류를 엿볼 수 있는 귀한 문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법지 풀이,
왕의 칙명대로
구실을 첨부한 소를 발생시켜 위해되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칙명대로 천을 공양하는 승
군관 군인 성관 다루가치 판관
왕래하는 승속 지방의 관리, 분락민들에게 통지함
대사에서 쓴 문서 <출처:중앙박물관>

이제현이 그렸다는 사냥 그림, 고려 14세기, 복제품,

고려 후기 학자인 이제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다. 맑은 설경과 말 탄 인물의 생동감이 잘 표현되었다. 그림에 그의 서명과 함께 ‘이제현인李齊賢印’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고 공민왕 무렵 화풍의 요소가 많은 데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중국 화풍의 명적을 모으고 유명 작가들과 널리 접촉하였던 만큼 이제현의 작품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제현의 문집, 익재집益齋集, 조선 순조 14년(1814),

고려말의 학자 이제현(1287~1367)의 문집이다. 그의 시문을 모은 『익재나고』와 문학론을 담은 『역옹패설』, 그리고 『습유』로 구성되었다. 고려 때에 간행된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전시된 책은 조선 순조 14년(1814) 경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이다.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모신 성리학자 이제현의 초상, 복제품, 국보, 원元 1319년,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제현의 초상화이다. 이제현이 33살이던 1319년에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 절강지방을 유람하던 중 충선왕이 진감여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린 것이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후 그림의 행방을 알지 못하던 이제현은 21년 후에 우연히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그림의 윗부분에 이제현이 지은 시와 원나라 문장가 탕병룡이 지은 그림에 대한 찬이 함께 쓰여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그림에는 이제현이 이 그림을 보고 읊은 시와 원나라 문장가 탕병로의 찬이 함께 쓰여 있다.


성리학에 심취했던 최문도의 묘지명, 고려 충정왕8년(1345).

원간섭기의 재상 최문도의 묘지명이다. 최문도는 충선왕의 근신인 최성지의 아들로,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성리학에 깊이 빠져 들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주돈이, 이정, 주희의 책을 읽느라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고 가묘를 세워 돌아간 분을 살아 계실 때처럼 잘 섬겼다고 하였다.

국자감 학생들을 깨우치는 글
저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인륜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벗어나니 곧 오랑캐의 무리와 같다. …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朱子의 글을 보았는데,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의 학문을 배척하여 그 공로가 공자孔子와 짝할 만하더라. 『회헌실기』 유국자제생문

안향의 글과 여러 일들을 기록한 책, 회헌실기晦軒實記, 대한제국 순종3년(1909),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안향(1243~1306)의 글과 말, 기타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모은 책이다. 안향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고려에 보급하였다. 그의 호 회헌은 흠모하던 주자의 호 ‘晦庵’에서 딴 것이다. 『회헌실기』는 안향의 17대 후손인 한극권이 조선 영조40년(1764)에 처음 간행한 이후 여러 차례 증보.중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경 국자감.

원나라 성종 때인 1306년에 창건된. 원.명.청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동쪽에 배향공간인 대성전이, 서쪽에 강학공간인 벽옹과 이륜당이 있는 동묘서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명나라 때인 1428년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도입
원나라에서 왕(충렬왕.충선왕)을 모시던 안향.백이정 등의 관료들은 주자성리학(이하,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성리학을 고려에 본격 소개하였다. 이후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대도로 간 이제현은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이라는 서재에서 저명한 원나라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당시 고려학자들이 성리학의 도입과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은, 성리학이 종전의 유학과 달리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논리 체계를 가진 새로운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지나치게 관념론에 빠진 불교나 미신적 기복 신앙 또는 개인적 양생수련에 치우쳐 있던 도교와 달리, 무신정권에 의해 위축된 유교 정치와 신분 질서를 복원하고, 토지의 불법 소유 문제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체계로 여겼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원 간섭 하의 고려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는 이후 80여 년간 원(몽골)의 간섭을 받았다. 고려 국왕은 어린 세자 시절을 원나라 대도大都에서 보내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국왕의 호칭이나 묘호를 비롯한 각종 관제가 격하되었고, 왕위 교체에 대해서도 원나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필요한 선박과 식량, 무기 등을 장만해야 했고, 군인과 선원으로 동원되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년 원나라에 바쳐야 하는 막대한 양의 금.은.모시.마포.인삼.잣.매 등의 특산물도 백성들의 부담이었으며,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로 뽑혀 가족과 생이별을 한 어린 여성들도 많았다. 한편 두나라 사이에는 문화적인 교류도 이루어졌다. 몽골의 언어나 머리모양, 복장 등 이른바 몽고품이 고려사회에 성행하였고, 고려 지배층을 위해 도자기도 수입되었다. 마찬가지로 고려의 의복과 신발.쓰개, 장신구 등도 원에 전해져 고려양이라 불릴 만큼 유행하였다. 후대의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성리학과 목면, 화약 제조 기술, 수시력 등이 도입된 것도 이 시기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말 공민왕은 대표적인 개혁 군주로 원나라가 쇠퇴해자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영흥 일대를 회복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하고 여러 제도적인 면을 개혁하였다. 물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후대 사람들이 높이 사서, 그의 신당이 조선 종묘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 후손이 없었던 공민왕을 승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원나라 노국공주와의 깊은 부부애로 인해서 그 초상화는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공민왕의 지원을 받은 목은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후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공민왕이 쓴 안동 영호루 현판 글씨,

안동 도심 낙동강변에 세워진 영호루

영호루 탁본첩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안동 영호루 현판의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글씨는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갔던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과 글씨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의 서체를 짐작할 수 있다. 탁본을 첩으로 만든 것은 조선시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 조선, 복제품,

고려 31대 공민왕과 원나라 출신 왕비 노국대장공주 부부의 초상화이다. 무신도의 색채가 짙은 이 그림은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림에서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둥근 깃에 소매가 넓은 단령포 차림이다. 노국대장공주는 화려한 관과 웅장한 소매 폭, 길게 늘어뜨린 치마 등에서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사냥 그림, 천산대렵도, 고려 14세기,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으로, 천산에서의 수렵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곤륜산의 북쪽 자락인 음산에서 사냥 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라고도 한다. 원래의 그림이 세 개로 분리된 것 중의 하나로서, 낡고 훼손되어 상세한 필법을 알기는 어렵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종묘의 공민왕 신당.

내부에는 있는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대렵도풍의 준마도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무덤 이름이 새겨진 청자대접, 공민왕 14년(1366)

“정릉”이라 새겨진 청자 넝쿨무늬 대접이다. “정릉”은 개성에 있는 노국대장공주의 능호(무덤이름)이다. 따라서 이 대접은 애초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제작한 것 중 하나이거나, 공민왕의 능행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출처:중앙박물관>


공민왕의 개혁을 도운 염제신의 초상화, 보물, 고려말, 복제품,

문신이자 공민왕의 장인인 염제신(1304~1382)의 초상화이다. 염제신은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키고, 공민왕 19년(1370)에는 오로산성 공격에 성공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공민왕은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하고 그 딸을 비妃로 들였다. 이 그림은 그 때 하사한 초상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의 품격 등으로 보아 공민왕의 작품일 가능성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혁군주 공민왕
원나라가 14세기 들어 정치 불안 등으로 쇠퇴해가자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은 몽골식 복장과 머리 모양을 폐지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원나라에 빼앗긴 영흥 일대를 되찾는 등 일련의 반원 정책을 추진하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내부 반란을 잘 넘긴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는 권문세족 등의 저항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원간섭기 내내 문제가 되었던 불법적인 토지.노비 소유를 과감히 개혁하기 위한 조치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교육과 과거 분야에서도 추진되었다. 대학자 이색을 중심으로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흥하고, 과거 제도를 성리학 중심으로 개혁한 것이 그것이다. 훗날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이러한 개혁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였다. 재위 말기에 공민왕은 요동의 동녕부를 공격하는 등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 등의 반발속에 신돈이 실각하고 공민왕 자신도 피살당하면서, 왕실이 주도한 개혁 정치는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의 고려 성균관 명륜당.

월대와 가운데 강당건물은 국왕이 방문하기도 하는 서울의 성균관과 형식과 규모가 비슷하며 좌.우익랑은 간략하게 지었다.

현재의 고려 성균관 대성전.

일반적인 향교 명륜당 규모로 중건되어 있다.

개성의 고려 성균관
고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터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17세기 초에 다시 지은 것이다. 18동의 건물이 남북으로 배치된 고려 성균관은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구역이, 뒤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 구역이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가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성균관의 중흥에 기여한 이색의 초상화, 조선후기, 복제품,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따라 성균관을 다시 짓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중.김구용.이숭인.박상충 등 쟁쟁한 신진들을 교관으로 근무하게 하는 등 성균관의 성리학풍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에 이성계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문하에 권근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는 등 조선 초기의 정치와 학문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북 영덕 괴시마을에 소재한 이색 생가터

목은 이색의 행적을 기록한 책, 일제강점기 1934년,

한산 이씨의 후손 이현규가 간행한 목은 색의 사실기(事實記)로, 이색의 행적에 대해 잘못 전해진 내용을 바로잡아 펴낸 것이라 한다. 이색의 아들 이종학의 사실기와 서천 문헌서원에 배향된 사람들의 명단이 부기되어 있다. 말미에 청주에서 1934년에 발행되었다는 간행기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목은 이색의 산문집, 조선후기,

고려말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의 문집 중에서 시를 제외한 문(文)을 모은 것이다. 이색의 문집은 태종4년(1404)에 처음 간행되었으나 글이 너무 방대하여 시와 문을 분리하여 「시고(詩藁)」와 「문고(文藁)」로 나누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유물에는 기(記) 74편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목은 이색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공민왕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성균관을 중영하고, 정몽주.김구용.이숭인 등 경학에 밝은 신진들을 교관으로 삼아 성리학품의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에 정도전 등의 급격한 토지개혁론에 반대하고 이성계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문하에 권근과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는 공민왕 사후에 극단적인 반동정치가 있었다. 반동세력은 신흥강국인 명을 적대시하고 원을 가까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정치를 하였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성계, 최영 등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 되었다. 고려말 유력가문 출신의 최영은 온건개혁파의 지지를 받았으며, 함경도 영흥 토호 출신인 이성계는 한미한 출신의 급진개혁파의 지지를 받아 경쟁관계를 이루었다.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들과 힘을 합쳐, 토지제도 개혁 등을 통해 권문세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조선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는 전주 오목대와 이목대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흥에 세워진 함흥본궁 정전을 그린 그림

함흥의 이성계를 찾아갈 때 지은 시, “옛 동주(지금의 철원)을 지나며”
넓은 벌 하늘 낮고 초목은 가을인데
긴 강은 띠처럼 성을 둘러 흐르누나
장군은 이 땅에서 오랭캐를 무찌르고
부절을 갖고 거듭오니 아직도 검은 머리
살피건대, 공민왕 계축년(1373) 봄에 나하추가 침략해 들어오자
우리 태조는 함흥평에서 적을 크게 깨뜨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 조선 18~19세기,

고려 말 급진파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인 삼봉 정도전(1342~1398)의 문집이다. 신진 관료로서 촉망받던 정도전은 이인임 등 친원파 대신들에 반대하다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우왕9년(1398) 함흥에 있던 정도전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이후 구세력 제거와 토지제도 개혁을 주도하며 조선왕조 개창의 명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출처:중앙박물관>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고려 말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신인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은 공민왕 때 성균관에서 정몽주.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 권신들에 맞서다 전라도에 유배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수년간의 방랑 끝에 우왕9년(1383)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의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서 인연을 맺었다. 우왕 14년(1388)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구세력의 제거와 토지개혁을 이끌며 마침내 이성계를 추대함으로써 새 왕조 개창의 주역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바친 사리갖춤, 고려 공양왕3년(1391),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살리갖춤이다. 가장 안쪽의 은제 도금 탑형 사리기와 이것을 넣는 은제도금팔각당형 사리기, 청동 발, 백자 발 순으로 포개어 납입되었다. 곳곳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1391년에 부인 강시 뜽 만여명과 함께 발원하여 만들어 봉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미술사적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이성계의 야망과 고려의 낙조가 교차하는 역사적 유물로서도 크게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리발

사리발에 새겨진 글자.

이성계, 미륵을 기다리며 불사리를 봉안하다.
고려 멸망 1년2개월 전인 공양왕3년(1391) 5월, 이성계는 정도전 등 개혁파 관료들을 앞세워 과전법을 공포하고 유례없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같은 달, 그는 1만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불교성지인 금강산 비로봉에 불사리를 봉안하여 미륵의 하생을 염원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등극을 미륵 세상을 여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를 위해 활약한 조반 부부 초상화, 조선후기, 복제품,

고려 말 이성계 일파에 힘을 보탠 재상 조반(1341~1401) 부부의 초상화이다. 조반은 위화도회군 이듬해에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 일파가 세운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고, 그 이듬해에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에 대해서도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풀어주는 등 이성계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그림은 조선 초기의 원본을 후기에 옮겨 그린 것으로, 고려말.조선초 관료의 모습과 부부 초상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성계의 왜구 격퇴를 기념한 비문, 황산대첩비명 탁본,

고려말의 신흥 무장 이성계 뒷날의 태조가 전라도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을 기념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운 승전비이다. 우왕 6년(1380)에 삼도순찰사이던 이성계는 함양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왜구들과 격전을 벌여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탁본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원래의 비를 탁본한 것이다.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썼다. 현재 남원시 운봉면에 있는 비는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초상화, 이한철 그림, 고종7년(1880), 복제품,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이다. 조선 고종17년(1880) 궁중 화가이던 희원 이한철이 개성 숭양서원에 있던 초상화를 옮겨 그린 것이다. 정몽주는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이학(성리학)의 시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정확하였다. 또 그는 우왕 때에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자 단속을 요청하는 이리본 사행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공 문제로 악화되어 있던 명과의 관계 회복에도 기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달리 이성계 일파에 끝내 협조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음으로써 훗날의 선비들에게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선죽교

선죽교(善竹橋)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다리이다. 이 다리의 일부에 띤 붉은 색깔을 정몽주가 살해 당할 때 흘린 핏자국이라 믿어왔다. 이 다리 인근에 정모주를 제사지내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이 있다.

정몽주의 문집, 포은집, 조선후기,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문집이다. 조선 세종21년(1439)에 아들 정종성이 처음 펴낸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전시된 책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것이다.

정몽주의 편지

근자에 들어니 약재(김구용)가 시묘(侍墓)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지금 공무가 한가하니 도은(이숭인)과 더불어 필마를 타고 가서 조문하려고 합니다. 만약 뜻대로 되면 천녕(천녕현)에서 하룻밤 이야기하며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보내 주시는 햅쌀을 받는데, 마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6월부터 이질을 앓아 30일이 되어 가는데, 요즘 조금 낫습니다. 아울러 아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사연은 돌아올 때로 미루고, 서늘한 가을에 몸조심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정몽주 올림.

포은 정몽주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는 목은 이색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할 만큼 주자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공민왕 때 이색이 대사성으로 있던 성균관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성리학품을 일으켰다. 우왕 때에는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행으로 일본을 다녀오고, 세공 문제로 악화된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행에 나서는 등 정치적으로 활약이 컸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이성계 추대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맞음으로써 훗날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무관>

길재의 편지

노선생(스승, 혹은 나이와 인품이 높은 사람) 문하를 오래 떠나 있어 때때로 의리를 강마(講磨)하지 못했습니다. 문득 의문스런 점이 있어 근자에 직접 장석(丈席, 학문 토론을 하는 자리 또는 스승을 의미, 방석을 깔 때 사이르 한 장 띄운다는 데서 유래)에 가서 삼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으나, 마침 신우(薪憂, 채신지우采薪之憂의 준말로 자신의 질병에 대한 겸칭, 병에 걸려 땔나무를 하지 못하는 근심이라는 의미)가 있어 실행하지 못하여 답답합니다. 이만 줄이고 두 번 절하며 편지를 올립니다.

야은 길재의 문집, 조선,

고려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가 남긴 시문과 후대 사람들이 길재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을 엮은 책이다. 선조6년(1573)에 간행된 『야은선생행록(冶隱先生行錄)』에 여러 임금의 사제문(賜祭文)과 서원의 향사문(享祀文) 등을 더하여 광해군 7년(1615)에 중간되었다. 이 책은 후손들이 새로 수집한 저자의 시문과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기록 및 후인의 찬영시(讚詠詩) 등을 수록하여 후대에 간행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양촌 권근이 지은 성리학 입문서, 입학도설(入學圖說), 1929년,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이 공양왕2년(1390)에 지은 성리학 입문서이다. 초학자들을 위해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도표로 그려 해설하였다. 권근은 고려말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정도전.김구용.이숭인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품을 일으켰다. 특히 『입학도설』운 훗날 퇴계 이황 등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유물은 1929년 논산에서 간행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주가 부인 유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두지 않으니, 내가 강을 건너면 몸 둘 바가 없습니다. 부인께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라 하고, 딸을 낳으면 명덕이라 하세요. 조복과 신발을 보내니 다만 이것으로 신표를 삼아 부인께서 세상 떠나신 뒤 이것들을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무덤으로 삼도록 하시고, 강에 이르렀다가 도로 중국을 향해 가는 이 날을 기일로 삼으시고 장례후에는 지문이나 묘갈은 쓰지 마세요.

고려의 충신 김씨 형제의 글과 행적을 모은 책, 쌍절록(雙節錄),

고려 말의 충신 김제.김주 형제의 글과 행적을 후손인 김양선이 순조3년(1803)에 수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형 김제는 경상도 평해 군수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섬으로 들어가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동생 김주는 공양왕4년(1392) 성절사로 명에 갔다가 귀국하던 중 압록강에서 고려가 망한 사실을 전해 듣고 부인에세 “충신불사이군忠信不事二君”이란 구절로 시작되는 편지와 조복朝服, 신발을 보낸 후 발길을 돌려 중국에서 여생을 마쳤다. <출처:중앙박물관>

저무는 왕조
공민왕이 피살되자 극단적인 반동정치가 펼쳐졌다. 10살의 우왕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는 신흥 강국인 명나라를 적대하고 명나라에 밀려난 북원과 교섭하는 시대착오적 외교를 펴는 한편, 폭력적 토지 겸병을 자행하며 정몽주 등 비판적인 신진들을 유배하는 전횡을 저질렀다. 이러한 가운데 왜구와 홍건적의 토벌로 민중의 여망을 한몸에 받던 이성계와 최영이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하였다(우왕14년, 1388). 유서 깊은 철원 최씨 가문의 최영은 온건개혁파의 지지를, 한미한 영흥 토호의 아들인 이성계는 불우한 처지의 북방 무인들과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지지를 받으며 서로 경쟁하였다. 마침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추진되었다. 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러 거듭 요동정벌의 중단을 건의하였으나 최영과 우왕이 이를 묵살하자 회군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도전 등 신진 관료들의 주도로 기존의 토지대장을 불사르고(공양왕2년, 1390) 과전법을 통한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공양왕3년, 1391) 권문세족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남은 것은 민심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 왕조를 여는 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