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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선실1] 조선의 건국과 제도 정비

중앙박물관 조선실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시점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전시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전과는 달리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중심으로 유물을 재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첫번째로 조선의 건국과 제도정비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조선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으로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유교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통치이념이 들어가 있는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법전격인 경국대전과 악학궤범, 국조오례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주역들의 유물로 태조의 호적과 건국 주역들의 공신녹권 등 조선 건국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 전기의 과학업적을 대표할 만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런 유물이 희귀하다보니 상당수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태종때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관삼감 측우대와 측우기’, ‘훈민정음언해본’ 등은 대표적인 과학기술 유물이지만 그 원본의 가치가 워낙 높고 귀하다보니 중앙박물관에는 복제품을 잘 전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군사유물로 서울시청 공사현장인 엣 군기감터에 발굴된 무기류들 또한 이 곳에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1, 조선의 건국과 제도정비

동궐도, 국제, 복제품, 1826~1831년,

조선왕조의 여러 왕궁 가운데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왕궁은 경복궁이며, 그 별명은 북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1867년 복원되기까지 270여 년간 경희궁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왕궁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이 동궐도는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圖畵署의 전문화가인 화원畵員이 그렸다. 왕궁 주위의 산과 언덕은 전통 화법으로 그렸으나 건물표현과 원근 처리에서 일부 서양의 화법도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왕궁의 모습과 궁중 회화의 높은 품격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된 동궐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건국과 제도 정비
14세기 후반 고려 내부의 폐단이 심화되고 대외적으로 원.명이 교체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속에서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을 주축으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따라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지향하였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는 고려와는 다른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질서였다. 조선 건국 후 100여 년 동안은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에 새 도읍을 건설하여 새로운 왕조의 면모를 드러냈고, 천문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하늘의 명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왕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독자적인 역법과 천문관측기구, 활자 등을 만들었으며, 조선의 실정을 반영하여 정리한 의서醫書와 약학서藥學書, 농서農書를 간행하여 문화적으로도 활발한 성과를 거두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조 이성계 어진, 국보, 고종9년(1872), 전주 경기전 소장, 복제품.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말로, 이 어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전주 경기전 등 전국 여섯 곳에 태조 진전眞殿을 설치하여 태조의 초상화를 봉인하였다. 기록상으로 현재는 태조의 초상화가 26축 제작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경기전의 초상화가 유일하다. 이 초상화는 태종10년(1410) 전주부에 봉안한 것을 영조39년(1763) 한 차례 수리를 거친후 고종9년(1872)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조 이성계 어진(얼굴 부분)

이성계 노비의 호적이 들어 있는 문서,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문서, 국보,

고려 공양왕2년(1390). 조선 건국 직전인 고려 공양왕2년(1390)에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화령(지금의 영흥)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이성계의 노비 및 이성계와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40호의 호적이 포함되어 있다. 준원전濬源殿에 대대로 보관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왔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사리갖춤,

고려 공양왕 2~3년(1390~1391).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이다. 이 사리갖춤은 가장 안쪽의 은제도금탑형사리기銀製鍍金塔形舍利器와 이 사리기를 넣는 은제팔각당형사리기銀製八角堂形舍利器, 동제발銅製鉢, 백자발白瓷鉢의 순으로 겹겹이 포개어 납입되었다. 사리갖춤 곳곳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1391년에 부인 강씨를 비롯하여 만여 명과 함께 발원하여 사리갖춤을 만들어 봉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리갖춤은 중국 원으로부터 들어온 라마교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고려말의 실례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사리갖춤.

은제도금사리탑과 백자발 등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당시 이성계 세력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조선건국의 공신 진충귀에게 내린 문서 (보물).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에게 내려진 공신녹권은 현재까지 여러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조 4년(1395) 공신도감에서 진충귀를 개국 원종공신에 봉하면서 발급한 기록 문서인 녹권이다. 이때 임명된 원종공신 106명에게는 각각 논밭 30결, 노비 3구와 함께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내리고,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오르는 특전을 주고 비를 세워 공로를 기록할 것을 명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의 즉위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즉위卽位.즉조.등극登極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은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 다움 왕위에 오를 사람을 미리 정하였는데, 이를 세자世子.세손世孫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자.세손이 없을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大妃 또는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새 왕을 지목하였다. 이때 왕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면 그 아버지는 대원군이라 하였다. 왕이 죽으면 대비는 왕과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인 국새國璽를 잠시 보관하였다가 새왕에게 전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을 하는 장소인 정전에서 거행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이 왕과 국가의 상징인 국새를 받고 어좌에 올라가 앉는 의식이다. 다만 국새는 전왕前王의 시신이 안치된 빈전殯殿에서 받았다. 왕이 어좌에 앉으면 신하들은 새 왕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세千歲를 외쳤다. 즉위식을 마치면 조선 왕실은 왕이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한 사실을 이웃 나라에 알렸고, 특히 중국 황제는 전왕의 시호와 함께 새 왕에게 곤룡포袞龍袍 등을 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복궁 근정전 닫집, 어좌, 일월오봉도.

궁궐의 닫집은 정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닫집안에는 국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가 있고 뒷편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닫집(唐家)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비바람.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당가唐家,운궁雲宮, 보개천장寶蓋天障이라고도 하였다. 왕궁의 정전이나 왕실의 사당, 사찰 법당의 닫집은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현재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등 조선 왕궁의 정전에는 크고 화려한 닫집이 전하고 있다. 이 닫집 모형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을 61%로 축소한 것이다. 이 닫집 모형에서 보듯 왕궁의 닫집 중앙에는 어좌御座, 용상龍床, 옥좌玉座라고 하는 왕이 앉는 의자가 있다. 어좌 아래, 즉 닫집의 기단은 탑榻 또는 어탑御榻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왕의 어좌 및 왕의 앞은 탑전榻前이라고 불렀다. 닫집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 두마리를 여의주 구름문양과 함께 그려 놓았다. 어좌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다섯봉우리의 산과 바다.태양.달 등을 그린 그림으로 이름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라고 불렀다. 닫집과 어좌 그리고 장식 및 문양과 일월오봉도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왕권.왕조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화준花樽, 국왕의 어좌를 장식하는 꽃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치가 열리는 궁전의 정전의 중앙에 어좌가 놓여지고 그 좌우를 장엄하는 것이 화준이다. 이 화준의 채화나무는 태양을 상징하는 홍도화紅桃花와 달을 상징하는 벽도화碧桃花 두 그루가 한 쌍을 이루는데 국왕의 자리에는 일월오봉도를, 왕비의 자리에는 모란도를 가운데 배치하는 것이 관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궁중음악에 쓰이는 악기 편경編磬, 조선후기, 복제품,

국악기 조율의 기준이 되는 악기이다.

석부石部에 속하는 타악기의 하나로 16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의 모양은 모두 같고 두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정해진다. 문묘제례악, 궁중의 의식이나 연회에서 연주되는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에 사용되었다. 고려 예종11년(1116) 송나라 아악이 들어올 때 편종과 함께 도입되어 조선 세종7년(1425) 박연朴堧이 중심이 되어 조선에 맞게 개량하였다.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국악기 조율의 기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악학궤범. 조선의 음악과 악기를 정리한 책.

처용가 등 조선시대까지 전해내려오는 많은 노래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 24년(1493) 왕명에 따라 조선의 예악과 관련된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음악, 춤, 악기 등에 대한 내용을 망라하여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정읍사>, <처용가>, <여민락> 등의 한글가사가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과학기술과 한글

조선전기 세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은 천문학은 물론 수학, 도량형,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등 모든 과학 기술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발전은 우리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표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한 표음문자를 사용할려는 의도는 신라시대 이두를 비롯하여, 일본어, 북방유목민의 문자인 거란어,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시대가 있었고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한글만이 거의 유일하게 민가생활에 깊게 뿌리내리어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문자로 자랑할만한 발자취를 남겨오고 있다.

빛나는 우리한글
조선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은 한글이었다. 표의문자인 한자대신 우리말을 소리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세종대 집현전을 중심으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종25년(1443)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어 3년 뒤에는 이를 해설한 책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초성의 기본자음인 ‘ㄱ,ㄴ,ㅅ,ㅁ,ㅇ’은 ‘혀,치아,입술,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 떠 만들었고, 중성인 ‘·,ㅡ,ㅣ’는 각각 ‘하늘과 땅, 사람’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 떠서 만든 세 글자를 기본으로 하였다. 초성과 중성 모두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글자를 만들어, 음양오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은 그 원리와 조직이 과학적이고 어떤 소리든 원형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훈민정음을 풀이한 책,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세종28년(1446), 복제품,

이 책은 간송미술간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에는 잘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28년(1446) 백성에게 반포한 책이다. 세종이 지은 서문에 이어, 해석과 쓰임법인 용례用例,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해례解例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이름은 ‘훈민정음’이며, 해석과 용례가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므로 보통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출처:중앙박물관>

오대산 상원사를 다시 세우며 쓴글(복제품),

월정사성보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조이지만 월인석보상절을 비롯하여 한글 사용에 가장 공이 큰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세조10년(1464)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미스님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지은 글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신미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한 일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도 신미스님의 기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활자에 담은 한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의 간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글 금속활자도 제작되었다. 언해본은 충신.효자.열녀의 모범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비롯하여 사서삼경 등과 같이 조선이 지향한 성리학적 가치를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한 내용이 많았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는 세조7년(1461) 간행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서 한글로 된 활자인 을해자(1455)와 같이 사용된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세종29년(1447),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으로 15세기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왕조가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읊은 노래 가사와 그 배경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비어천가는 궁중 연회에서 불려졌으며 모두 125장이다. 편잔, 간행 경위에 대해서는 정인지(1396~1478)의 서문과 최항崔恒(1409~1474)의 발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을해자로 찍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세조7년(1461),

세조가 직접 번역하고 세조7년(1461)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능엄경』의 한글 번역본이다. 온전히 불교경전으로는 가장 먼저 언해된 것으로 15세기 국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문 부분은 세조1년(1455)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였다. 함께 사용한 한글 활자도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두보의 시집을 한글로 번역한 책, 두공부시언해杜工部時言解, 성종12년(1481),

유윤겸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번역하고 분류해서 간행한 책이다. 한문 부분은 강희안姜希顔의 글씨체로 세조1년(1455)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를 사용하였다. 함께 사용한 한글활자도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예로 초기 한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글금속활자(왼쪽, 사진), 을해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금속활자(오른쪽), 15세기,

세조7년(1461)에 간행된 『능엄경언해』에 사용된 한글 활자이다. 제작 시기는 을해자가 주조된 세조1년(1455)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세조7년 사이로 추정된다. 활자의 글자체가 조선 후기의 것과 다르며, 활자의 모양도 조선 후기와 달리 활자의 뒷면이 평평한 것이 주를 이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시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 시경언해詩經諺解,

숙종30년, 유교의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 시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이다. 이 책의 인쇄에 사용된 활자는 현종9년(1668)에 갑인자甲寅字의 글씨체로 네 번째로 주조한 무신자戊申字이며 한글 활자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무신자병용 한글활자를 사용하였다. 책의 첫 장에 왕세자를 뜻하는 춘궁春宮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무신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금속활자, 17~18세기,

현종9년(1668)에 갑인자甲寅字를 글자본으로 만든 네 번째 금속활자인 무신자로 언해본諺解本을 찍을 때 사용한 한글활자이다. 무신자를 제작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활자는 다섯번째인 갑인자인 임진자壬辰字와 여섯번째 갑인자인 정유자丁酉字로 간행한 언해본에도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생활에 스며든 한글
한글이 창제된 후 문맹 상태에 있던 많은 백성들이 한글을 익히면서 언어생활이 윤택해졌다. 대분의 책과 문서, 편지 등은 한문으로 쓰였으나, 점차 왕실이나 사대부, 특히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꾸준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었다. 백성들은 한자라는 언어장벽으로 막혔던 민원을 해소하고, 친지간에 서신을 왕래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적극적으로 한글을 활용하였다. 사대부들이 향유한 한문 문학 외에도 한글로 쓴 시조와 가사, 설화와 소설들이 등장하였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농서나 의학서, 요리법을 적은 책 등도 한글로 간행되었다. 또, 사리기를 싸는 보자기나 여성들의 생활소품, 그릇 등의 뒷면에 한글을 써넣는 등 생활주변의 집기에도 한글을 활용하였다. 이렇듯 한글은 창제 이후 꾸준히 사용되다가 조선후기 한글 문헌의 간행이 활발해지고 사용 범위가 확대되면서 점차 문자생활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원이 엄마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 복제품, 선조19년(1586),

안동시 정상동에 있던 이응태(1556~1586)의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편지이다. 이응태의 부인(원이 엄마)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 관 속에 넣어둔 것이다. 이 편지는 함께 출토된 머리카락 삼은 미투리와 더불어 조선시대 부부의 사랑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와 한문편지, 복식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편지 내용,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련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떠나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루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시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건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한글 ‘해안군’이 적혀 있는 청동병, 16세기,

‘해안군’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청동으로 만든 병이다. 해안군海安君이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은 중종의 아들 이희와 선조의 왕손 이억 두명이 있다 병의 형태로 보아 이 청동병은 중종의 아들 해안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허균許筠(1569~1618), 조선후기,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비판, 부패한 정치에 대한 개혁 등 저자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고 자라난 길동이 집을 뛰쳐나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고 양반계급을 괴롭히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율도국栗島國에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이 써 있는 이윤탁 비석 탁본, 중종31년(1536), 보물의 탁본,

묵재 이문건이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어머니 고려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중종31년(1536)에 세운 묘비의 탁본이다. 묘비의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한문으로 묘비를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는 글이 각각 새겨져 있다.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린이용 한자자습서.

1577년 최세진이 지은 어린이용 한자 자습서이다. 최세진은 당시 한자 학습에 사용된 책들이 실제 사용되는 글자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하여 초목, 자리, 복식 등에 쓰이는 글자들 위주로 이 책을 편찬했다. 상.중.하 각권에 1,120자씩 총 3,360자를 수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세종대의 과학기술
세종대에는 천문학은 물론 수학과 도량형, 지리학,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인쇄 등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이는 동양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의 특성을 반영한 세종대의 유산이었다. 특히 천문학은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대표적인 성과로는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의 완성과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구仰釜日晷, 간의簡儀, 측우기測雨器, 수표水標와 같은 천문.기상 관측기구의 제작을 들 수 있다. 무기 제조 분야에서는 조선식 총통완구와 다연발 로켓발사대인 화차가 개발되었다. 2009년 군기시터로 추정되는 서울시 청사 부지에서 명종18년(1563)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 등이 출토되어 16세기 이후에도 세종대의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계승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상감 측우대와 측우기, 보물, 복제품,

측우대는 철로 만든 원통형의 측우기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이 측우대는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曆數 등을 맡아 본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복제한 것이다. 측우대 위에 놓여 있는 측우기는 측우대의 구멍에 맞추어 복원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 최초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조선 태종2년(1402),복제품,

조선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현재 전시되고 있는 것은 복제본으로 원본은 일본 류코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당시에 알고 있던 지식을 총망라하여 만든 세계지도로 우리나라를 실제보다 크게 그려 놓고 있다.

태종2년(1402) 권근의 주도 하에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이다. 중국과 일본의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과 세계의 땅에 대한 정보를 집대성하였다. 조선 초의 세계인식을 잘 보여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지명 130여 개를 표시하는 등 당시의 지리정보를 충실히 담아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군사훈련서, 병장도설

성종 23년(1492)에 간행된 군사훈련서인 <진법>을 영조 16년(1742)에 개명하여 재차 간행한 책이다. <진법>은 군제와 군사의 조련에 관한 책인데, 영조 대에 선대의 유업을 널리 펴려는 목적으로 다시 간행하면서 <병장도설>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전기의 중앙군사 조직인 오위제에서 시행한 군사훈련법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화약이 담긴 청동그릇, 조선전기

쇠로만든 큰 화살의 촉과 날개

불랑기포에 실탄을 장전하는 자포인 불랑기자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포로 서양(아마도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것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무기이다. 명중율과 파괴력은 높지 않으나, 운반과 사용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서 육상에서 사용된 화포의 주력으로 구한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청 공사현장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불랑기포는 조선시대 서양에서 전해진 신형 대포의 일종이다.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홈통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06년에 75근 8량을 들여 김석년이라는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불랑기자포와 제작연대와 형태가 같다. <출처:중앙박물관>

휴대용화기인 승자총통.

서울시청사 공사터에서 발굴되었다.

서울 신청사 부지의 한 건물터에서 여러대의 휴대용 화기가 엉겨 붙은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이 건물터는 조선시대 무기의 제작을 맡았던 관청인 군기시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부속시설로는 야로소, 조갑소, 화약감조청, 궁전소 등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 현종2년(1661),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다. 세조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16년(1485) 완성되었다. 조선초기 『경제육전經濟六典』과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만들었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조 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태조실록太祖實錄, 국보, 복제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공식 역사 기록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고려의 관례에 따라 역대 왕별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기사를 망라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였다. 『태조실록』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충신.효자.열녀의 바른 생실을 모아 그림으로 엮은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조선후기,

유교 윤리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인 삼강三綱과 관련된 실제 사례들을 모아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명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인물 가운데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의 행실을 뽑아 세종16년(1434)에 편찬되었다. 이후 분량을 줄인 산정본刪定本, 한글 언해본 등이 간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국조오례의, 국가의 주요 의례를 정리한 책.

오례는 길례(제사),빈례(손님맞이),가례(결혼),군례(군사),흉례(장례)를 말한다.

조선시대 주요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과 절차를 오례로 나누어 정리한 책이다. 세종 때 편찬된 <오례의>를 보완하여 성종 5년 신숙주 등이 완성하였다. 함께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에는 오례별로 도설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자 금원군의 탄생을 기록한 태지, 중종14년(1519),

조선 중종의 왕자 금원군의 태실에서 나온 태지이다. 태지를 통하여 금원군이 중종8년(1513) 6월9일 오시午時(11~13시)에 태어났고 중종14년(1519) 2월7일 사시巳時(9~11시)에 태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홍치십이년”인 새겨진 태지와 백자 태항아리, 연산군5년(1499),

홍치11년(1498)에 태어난 왕자 강수 아기씨의 태를 묻은 백자 태항아리와 그 내용을 기록한 태지석이다. 강수 아기씨는 조선 10대왕 연산군의 서자로, 양평군에 봉해졌다. 조선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백자항아리에 태를 담아 밀봉하여 태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폐비 윤씨의 태항아리, 성종9년(1478).

폐비 윤씨는 1476년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가 1479년 폐출되었다. 그녀의 아들은 성종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다. 폐비윤씨의 태실은 그녀가 왕비로 있을 때 경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 입구의 오른쪽 산에 마련하였다. 여기에 전시된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왕실의 태실을 정비하여 태지와 함께 예천에서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조와 불교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왕조는 억불정책을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했지만, 삼국시대부터 국민들의 생활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조선의 개국에 크게 공헌한 무학대사, 월인석보상절을 저술하는 등 불교를 크게 후원한 세조, 조선중기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오늘날의 불교를 있게 만든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 등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국가적으로 후원을 받은 양주 회암사, 세조가 크게 중장한 오대산 상원사, 왕릉을 지키면서 선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 등을 두어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게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불교 유물로 회암사 절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 기와, 잡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할 유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서의 지향을 뚜렷이 하고 억불정책을 내세웠으나, 생활속에 뿌리내린 불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왕실에서도 원찰을 두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태조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번성한 경기도 양주 회암사나, 세조와의 인연으로 중창된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가 대표적이다. 세조 대와 명종대에 잠시 성행했던 왕실불교는 성종대 사림의 진출 이후 불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점차 산중불교山中佛敎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불교계는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활약하여 호국불교의 면모를 보이는 등 노력이 이어졌다. 이후 17, 18세기에도 전란과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대규모 법회가 증가하는 등 신앙으로서 불교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금탁, 조선 태조3년(1394),

태조3년(1394)에 만든 금탁으로 시주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보광전 터에서 출토되었다. 금탁에는 모두 134자의 명문이 남아 있는데,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지’로 시작하여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문의 조선국왕은 태조,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 세자는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에 희생된 방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왕실의 원찰, 회암사
경기도 양주 천보산 남쪽에 자리잡은 회암사檜巖寺는 태조 이성계의 후원 이래 역대 왕들의 영정과 제사를 모시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선왕실의 원찰로서 번성하였다. 회암사 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회암사의 큰 규모와 건축양식, 이곳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탁과 기와, 잡상 등은 조선전기 회암사가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뒷받침하는 한 사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왕실의 원찰인 양주 회암사, 양주에 위치한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크게 번성한 사찰이다. 이 곳에서 무학대사가 주지를 지냈으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또한 이곳에서 불교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크게 번성했다가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에 반감을 가진 유림들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양주 회암사지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기와들, 세종18년(1436), 세조6년(1460), 효령대군 명칭과 ‘정통병진’이라는 글씨와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어 왕실과 관계깊었던 사찰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칭호와 ‘정통병진正統丙辰'(1436) 글씨가 새겨진 기와, ‘天順庚辰'(1460)이 새겨진 봉황무늬 기와와 용무늬 기와들이다. 용과 봉황무늬기와가 함께 사용된 것은 회암사가 왕실 관련 사찰이어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이다. <출추:중앙박물관>

천순경진’ 글씨와 함께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 새겨진 기와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장식기와, 조선전기,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잡상으로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형 관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잡상은 궁궐이나 왕을 상징하는 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곳 회암사에서는 잡상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양주 회암사지의 무학대사 홍융탑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크게 중창한 오대산 상원사.

가장오래된 동종인 상원사 동종도 이 시기에 상원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봉은사

조선왕실에서는 왕릉에 원찰을 두어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서울 강남의 봉은사는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조선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문정왕후가 불교의 중심지로 만든 사찰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하여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 시기에 배출된 고승이다.

조선실 개관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건국되어 500여 년간 고유한 문화를 꽃 피우고 발전한 나라였다. 현재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서 비롯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 볼 수 있다. 조선실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시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전시대상으로 삼았으며 모두 5개 전시실로 구성하였다. 조선1실은 태조 이성계와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 왕조의 기틀이 되는 제도 정비로부터 세종대의 누부신 과학문화와 한글 창제를 소개하였다. 조선2실에서는 16세기 이후 조선사회를 이끌어 간 사림의 학문과 성장 과정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선비문화를 조명하는 한편,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중국.일본과의 교류와 갈등을 짚어 보았다. 조선3실은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색한 새로운 정치질서와 사호제도 그리고 생활 풍습을 다루었다. 조선4실에서는 영.정조대의 탕평정치, 실학, 지도 제작,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같은 학문.예술 방면의 변화와 다양한 계층의 문화를, 마지막으로 조선5실에서는 개항기 척사와 개화를 지향한 움직임과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대한제국기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