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조선실2] 사림의 성장과 대외관계

조선전기 성종대부터 고려말 이색이 문인이었던 김종직을 중심으로 신진관료였던 사림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림은 대체로 조선을 건국한 주체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에 속하지만 조선초에 벼슬에 진출하지 않고 향리로서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연산군대와 중종, 명종대에 걸쳐서 여러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었다. 중종대 조광조가 성리학을 조선에 맞게 변형시키고 이를 현실정지에 적용하는 도학정치를 주장했다. 조광조 이후에 이황.조식.이이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현실정치에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다향한 학파가 형성되면서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중기 사림정치를 이끈 조광조선생의 문집, 이황 선생의 성학십도, 이이 선생의 성학집요를 전시하고 있어서 조선을 이끈 대표적인 학자이자 사상가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들이 어린시절 배웠던 주요 교재들인 천자문, 소학 등의 교재와 경서통, 회초리 등의 교자재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이들의 공부한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관료로서의 길을 열어 주었던 과거합격증과 합격자 명단 등 당시 양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사림의 성장과 대외관계
사림史林은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로, 16세기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어갔다. 사림은 자기반성과 사상적 모색을 통해 성리학을 조선에 맞게 변형시켰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적용하는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이 시기의 사상논쟁을 통하여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었고 이는 정파로 연결되어 붕당정치朋黨政治의 근간을 이루었다. 사림은 향촌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공론을 주도해 나갔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명明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어 사대교린을 기본 외교노선으로 주변 나라와 교류하였다. 조공책봉제도는 조선의 대내외적 정통성과 안정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 동시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을 제외한 일본, 여진, 유구 등의 주변국과는 교린정책을 기본으로 교류가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리학과 사림정치
16세기 성리학 이론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서경덕.이황.조식.이이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등장하여 학파를 형성하였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림은 중종대 조광조가 주장한 도학道學정치를 계승.발전시켜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같이 성학聖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성학이란 성인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국왕도 성리학을 공부하여 정치에 실현해야 한다는 배경에서 강조되었다. 이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君臣共治의 이념을 추구하는 사림정치의 이론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의 학문에 대해 쓴 책, 성학집요聖學輯要, 이이李珥(1536~1584), 이이선생은 오늘날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천재로 당시에 시행했던 모든 과거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이책또한 옛책을 옮긴것이 아니로 중요한 내용을 본인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31년(1755),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가 왕이 알아야 할 성리학의 가르침과 여러 학설, 즉 성학聖學의 핵심을 보기 쉽게 뽑아 엮은 책이다. 이이는 이 책에서 왕이 인격을 수양하고 좋은 신하를 등용하며 이들에게 국정을 위임함으로써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성리학의 핵심 원리를 그린 그림, 성학십도聖學十圖, 이황李滉(1501~1570), 조선후기, 성리학의 핵심 원리를 그린 그림인 성학십도. 이황선생이 성리학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워낙 어려운 학문이라 그림을 봐도 무슨뜻인지 이해하기는 쉽지않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이 왕이 이해하기 쉽도록 성학聖學의 개요를 10개의 도설로 그린 것이다. 이황은 그 중 천명天命을 다루는 <태극도太極圖>와 인간의 심성을 다루는 <심통성정도心統聖情圖>를 성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6세기 대표적인 성리학자 성혼의 문집, 우계집牛溪集,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혼의 시문집이다. 문인들에 의해 광해군 13년(1621)에 처음 발간되었다. 이 책은 순조9년(1809)에 7세손 성긍주에 의해 밀양에서 간행된 것으로 창녕의 물계서원에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성혼은 율곡 이이와는 평생지기였으며 여러 차례 선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광조의 글을 모은책인 정암선행문집. 조선 중종때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다 훈구세력의 공격을 받았던 조광조 선생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중종 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조광조의 시문집이다. 조광조는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며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 등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책에는 중종 13년(1518) 홍문관 부제학 재임 시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한 상소문 등 조광조의 대표적인 글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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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이 지은 향약에 관해서 지은 불우헌집. 향약은 조광조가 주창한 성리학을 향촌생활에 접목하는 것인데, 그 취지는 좋았으나, 실제로는 지방의 토호세력들의 계모임과 같은 성격으로 변질된 면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후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소작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향약에서 볼 수 있듯이 좋은 취지라 할지라도 그 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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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쓴 향약의 서문, 이황 필 향입약조서

명종 11년(1556) 이황이 안동 예안에서 시행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씨향약>을 본 떠 만든 향약인 <예안향약>의 서문이다. <예안향약>은 향약의 4대 덕목 중 과실상규를 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영남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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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 문인들의 모임(金蘭半月會文, 조선 17세기 추정)

이 자료는 550년 전에 결성된 국내 최고의 향촌 계회 조직인 금란반월회이 내력, 회의 규칙, 회원의 이름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금란반월회는 강릉지역의 향촌사회를 유학적 이념으로 개혁하기 위해 세조 12년(1466) 음력 9월9일에 강릉 지방의 유학자 16명이 결성한 단체이다. 이 모임은 향촌 사회에 유학을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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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 동갑내기 문인들의 모임(甲乙同契之圖, 조선 17세기 초)

1614년과 1615년에 태어난 강릉지역 문인 16명이 경포대에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경포대를 배경으로 한 모임의 모습이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림 좌측에엔 경포대에서 동감, 동향인 구성원들이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그림 아래쪽에는 회원 16명의 이름과 자, 본관, 거주 촌락 이름을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선비의 공부법
선비는 먼저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 등으로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익히고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이상적 인간형인 선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기修己의 첫 단계는 <소학小學>에서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한 단계의 교재로는 <동몽선습童蒙先習>.<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있으며, 특히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은 <소학>을 조선에 맞게 지은 수신 교과서였다. 다음 단계로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고, 그 사이에 <근사록近思錄> 같은 성리서와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로 식견을 넓혔다. 여가에는 거문고 타기, 활쏘기, 투호 같은 것을 즐기되 때와 법도에 맞게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아동용 수신서, 동몽수지(童蒙須知, 주희朱熹(1130~1200), 조선후기)

OLYMPUS DIGITAL CAMERA동몽수지의 다른 페이지.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지은 책을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이다. 본격적인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린이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와 예절을 적었다. 의복, 예절, 바른 언어와 걸음걸이, 책을 읽고 쓰는 것 등 생활의 여러 사소한 일 등에 대해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사항 등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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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의 구절을 써넣은 대쪽, 경서통經書筒, 조선 18~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지휘봉에 새겨진 글, 조선시대 훈장이 서당에서 사용하던 지휘봉, 서간書竿, 서당에서 훈장이 학동을 가르치거나 글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일종의 지시봉이다. 직육면체로 된 긴 막대기형을 하고 있으며, 손잡이에는 주요 유교 경전에서 뽑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기, 중국 한漢 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조선시대에 갑인자로 찍어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중국 전설시대인 오제五帝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시기까지 통사를 다루고 있다. 개인이 펴낸 역사서이지만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되는 기전체紀傳體(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계) 형식의 효시를 이루었다. 『사기』는 조선시대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공부해야 할 필독서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성리학 입문서(小學, 유자징, 중국)

OLYMPUS DIGITAL CAMERA성리학입문서(소학, 유자징, 중국)의 다른 페이지

선비가 되는 첫 단계인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입문서로 주희의 제자 유자징이 편찬하였다. 소학은 중종 대 개혁 정치를 추구한 조광조, 김안국 등 기묘사림己卯士林이 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김안국은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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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을 풀이한 해설책인 시전대전. 당시 과거시험을 공부하던 선비들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책자이다.

시경을 중국 고대의 시를 모은 책으로, 오경 중의 하나이다. 사서오경은 과거 공부의 핵심교재였다. 이 책에는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으며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어 옛 선비들의 공부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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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종이에 금가루로 쓴 『대학장구』(大學章句, 조선)

검푸른 종이(紺紙)에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쓴 『대학장구』이다. 『대학장구』는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사서(四書)의 『대학』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책이다. 핵심 내용은 3강령(綱領)과 8조목(條目)으로 요약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책을 보관하는 상자, 책함冊函,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 홍영순 진사 합격증, 임석헌 대과 합격증, 

홍영순 진사 합격증, 白牌,인조5년(1627) 8월19일 전 사과 호영순을 生員科 3등 33번째 합격자로 인정하는 증서이다.오른쪽 여백에 써서 붙인 종이는 후대의 것이다. 생원, 진사 시험의 합격증은 흰 종이에 쓰기 때문에 백패라고 한다. 임석헌 대과 합격증, 홍패紅牌 교지敎旨, 영조20년(1744), 영조 20년(1744) 10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하급관리 임석헌에게 내린 문과 합격증이다. 임석헌은 문과文科 을과乙科 2등 제7인으로 급제하였다. 문과와 무과 시험의 합격증은 붉은 종이에 쓰기 때문에 홍패라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흰종이에 쓴 소과 시험 합격증인 백패 (보물725호), 붉은 종이에 쓴 대과시험 합격증, 홍패 (보물725호). 과거합격증인 홍패는 가문의 영광과 같은 존재라서 그런지 전국적으로 주요 가문들에는 이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흰종이에 쓴 소과 시험 합격증인 백패 (보물725호), 중종 2년(1507) 유학(벼슬하지 않은 유생) 양공준이 생원시험 3등급 59번째로 합격하였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소과인 생원, 진사 시험을 통과하면 백패로 불리는 합격증서와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최종 합격자 수는 생원, 진사 각 100명이었다. 붉은 종이에 쓴 대과시험 합격증, 홍패 (보물725호). 중종 15년(1520) 성균관 생원 양공준이 문과 시험의 병과 8번째 급제자임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문과, 무과 시험을 대과라고 하는데, 여기에 합격해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대과 합격자는 홍패로 불리는 합격증서를 받고 여러날에 걸쳐 축하 행사에 참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 전기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단,

OLYMPUS DIGITAL CAMERA합격자 명단의 다른 페이지.

선조18년(1585)에 시행된 사마시司馬試의 합격자를 적어 놓은 책이다. 사마시는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의 별칭이다. 대개 예문관에서 간행하여 관계자.합격자들에게 배포하였다. 합격자를 합격순서에 따라 열거하고 합격자마다 1행에는 이름.자字.생년간지生年干支.본관.거주지 등을, 2행에는 아버지의 관위와 이름, 3행엔느 부모의 생존여부와 형제의 인적사항을 적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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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합격자명단, 정덕계유문무잡과병목 (보물603호)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문무잡과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의 명단이다. 조선전기 방목은 희귀한데 특히 세 개과의 합동 방목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조선전기 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합격자는 갑.을.병과 등수대로 등재되었으며, 본인의 성명과 함께 본관.거주지.처.부모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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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답안지 모음(試券成冊, 조선 1850년)

철종1년(1850) 전라좌도 남평현(南平縣) 경과증광별시(慶科增廣別試) 문과초시(文科初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모아 기록한 책이다. 이는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책으로 당시 과거시험의 경향 및 공부방법을 알려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네
부리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와
맑은 향기 저절로 뜰 안에 가득하네
- 퇴계 이황, <달밤 도산에서 매화를 읊다> 중 -

OLYMPUS DIGITAL CAMERA산청 남계서원 모형. 중앙박물관에는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 모형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원 또한 향약과 마찬가지로 선현의 제사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후대에서는 지방토호세력들이 지방관리의 정책을 억압하고, 붕당을 형성하고, 공교육인 향교를 무력화시키는 등 많은 폐해를 발생시켰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여론에 먹혀서 가능했던 이유도 당시 서원세력들이 민심을 많이 잃어서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전기 양반들의 생활모습

조선전기 양반사회의 모습은 선비들이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고, 관직에 입문해서 관직생을 하다가 낙향해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당시에 양반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 또한 그들이 읽었던 서적들, 과거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려주는 홍패.백패, 관직 임명장인 교지, 그들이 정책에 대한 글을 올린 상소문, 일생을 정리하면서 정리한 각종 일기와 문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런 유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양반의 일생에 관련된 문서 이외에도 당시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 자녀들 사이에 유산상속을 정리한 분재기, 관가에 등록한 호적, 지방사회를 교화시키고자 만든 향약, 계모임을 묘사한 그림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많은 유물들 중 율곡 이이선생 남매의 분재기를 전시함으로써 당시 재산분배에 남녀차별이나 장자우대가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또한 당시 선비들이 사용했던 문방구와 문집, 한석봉의 글씨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조선전기의 혼인풍습
조선전기에는 혼인한 뒤 남편과 함께 친정에 사는 여성이 많았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도 이이가 6살 때까지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 이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고려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혼인풍습이었다. 나라에서는 성리학적 가정의례인 <주자가례>에 따라 신부가 신랑 집으로 시집을 오는 ‘친영례親迎禮’를 장려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또 여성이 시집갈 때 가져간 재산은 남편 재산과 따로 관리하고, 유산의 상속도 별도로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손에게 남긴 유서, 영조14년(1738),

1728년 7월 전라도 창평현의 유력한 가문인 장택고씨 가문의 고만룡이라는 사람이 자손에게 남긴 유서이다. 이 문서에는 조상제례가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과 이를 위한 토지 및 노비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가문이 영원히 번창하기를 바라는 어느 양반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딸도 제사를 지낸 조선전기
조선시대에도 딸이 제사를 지내는 때가 있었다. 16세기까지는 부모가 죽으면 아들 딸 구별 없이 부모의 유산을 고루 나누어 물려받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냈다. 16세기 후반부터 제사를 모시는 풍습을 바꾸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1566년 이이의 남매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눌 때 이이는 당시 관행이던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를 반대하고 맏형이 제사를 전담하는 ‘장자봉사長子奉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남이 제사를 전담하고 재산을 많이 받는 것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이의 남매들이 재산을 나누며 작성한 문서, 이이남매 분재기(보물477호). 조선전기 재산분배에 있어서 남녀구분과 장자우대의 원칙이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 제사 또한 장자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냈다고 한다. 분재기의 주요 내용은 제사를 어떻게 지낼것인가 하는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분재기의 주요 내용은 제사를 지내는 원칙으로 자손들이 모두 제사비용을 분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이가 31세 되던 명종 21년(1566) 이이의 남매들이 모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눈 문서이다. 분재기의 첫머리에는 재산분배의 원칙, 제사 비용과 장소에 대한 합의를 기록하고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받을 재산을 기재하였다. 조선전기의 아들 딸 구분 없는 재산상속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마지막에 분재기에 합의한다는 의미로 참석자들이 서명을 하였다.

분재기의 구성과 내용
문서의 처음에는 7남매가 모여 합의한 날짜를 기록하고 제사 지내는 원칙을 정하였다. 제사는 종가에서 지내되 일이 있을 때는 형제 가운데 담당자가 지낼 수 있게 하였으나, 기제사는 돌아가며 지내지 않도록 하였다. 제사 비용은 친자녀는 쌀 10되, 친손자녀는 5되, 친증손자녀와 외손자녀는 2되씩 지원하도록 하였다. 다음은 조상의 제사를 안정적으로 모시기 위한 봉사조와 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위한 묘직조로서 재산을 따로 배정하였다. 다음으로 이이 남매에게 배정된 재산 내역을 기록하였다. 재산은 크게 논밭과 노비로 나눌 수 있는데, 거의 균등하게 배분하였다. 논밭은 비옥도, 수확량 등을 감안하여 면적을 배분하였다. 노비는 봉사조 3명, 묘직조 5명과 서모 몫 3명을 제외한 108명을 7남매가 똑깥이 15명씩 나눈 후 남은 3명은 나이 순서대로 위로부터 1명씩 더 분배하였다. 이 문서의 집필은 맏형인 이선이 하였다. 마지막에는 재산을 나눈 내용에 합의한다는 표시로 참석자들이 서명인 수결을 하였다. 참석자 가운데 남편이 죽은 셋째딸은 서명하지 않고, 다른 딸들은 남편이 대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초충도 중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개비>, <양귀비와 도마뱀>,

OLYMPUS DIGITAL CAMERA초충도 중 <원추리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하는 초충도,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하는 8폭의 초충도 가운데 5폭의 그림이다. 초충도란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으로, 풀벌레는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형상과 정신이 충분히 표현되어 실물과 거의 유사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려야 한다. 신사임당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이 그림에는 실물에 가깝게 꽃, 벌레, 식물, 동물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왼쪽부터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개비>, <양귀비와 도마뱀>, <원추리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쇠똥벌레>의 다섯 그림이고, 이 외에 <산차조기와 사마기>, <오이와 개구리>, <어숭이와 개구리>가 더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족보, 정조14년(1790),

전라도의 유력한 가문인 장택고씨의 족보로 정조14년(1790)에 만들어졌다. 이 족보에는 유언장의 작성자인 고만룡이 나오고 있어, 그의 형제 및 후손에 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명한 학자들의 편지를 모은 책, 조선후기,

고려말의 정몽주로부터 19세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대학자 108명의 글씨 모음이다. 후대에 간찰첩을 만들면서 각 글마다 오른쪽에 글을 쓴 사람의 이력을 간략하게 기재하였다. 각 시대별로 이름난 사람들이 직접 쓴 글씨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러 선비들의 글씨를 모은 첩 .

명필 석봉 한호를 비롯한 문사 12명이 쓴 글씨가 실린 서첩이다. 백광훈, 이우, 김현성 등 주로 16세기에 활동한 선비들이 쓴 시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책이나 문방구를 놓는 목가구, 사방탁자四方卓子, 조선후기달방의 매화그림, 야매도夜梅圖, 전 魚夢龍, 광해군14년(1622), 복제품,

어몽룡은 이정, 황집중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문인화 삼절三絶로 불린다. 이 그림은 조선 중기 이후 새로운 매화 그림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꼿꼿이 솟아오른 가지가 매화의 선비다운 기품을 드러내며, 가지에 듬성듬성 핀 매화가 달빛과 어우러져 고아한 멋을 더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필 한호의 글씨, 보물1078호, 조선17세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명필 한호韓濩(1543~1605)가 쓴 글씨를 모은 서첩이다. 푸른색 종이에 금색 물감으로 해서.행서.초서를 다양하게 썼는데, 말년의 원숙한 서풍을 보인다. 1,2첩에는 선조 35~37년(1602~1604)에 쓴 필적이 실려 있고 3첩은 도교 경전을 필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는 다양한 집안에서 가보로 소장하고 있으며, 천자문 글씨체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필 한호의 천자문, 순조9년(1809), 어린이용 한자 교과서인 천자문.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쓴 천자문의 글씨체는 오늘날도 한자를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중으로 따라서 쓰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글 주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선조때에도 한글의 영향력이 생활전반에 미쳐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 교과서로 쓰이던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조16년(1583) 명필인 석봉 한호가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을 해서로 쓴 것이 처음 간행되었다. 한글로 훈과 음이 달려 있는 이 책은 처음 간행된 이래 왕실.관아.사찰.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어 초학자의 한자공부와 글씨 연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매화와 대나무를 새긴 벼루, 15~17세기,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먹, 조선후기, 백자연적,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선비들의 책상, 조선후기,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담은 책, 논어집주論語集註, 주희,

조선후기,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희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담은 『논어論語』에 선대의 학자와 자신의 주석을 모아 만든 책이다. 주희에 의해 『논어』,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사서四書라고 불리게 되었고, 사서는 유학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대외교류와 임진왜란, 병자호란

조선 전기 동아시아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북방의 몽골과 여진, 한반도의 조선 그리고 일본이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는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를 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괴롭혀 왔던 일본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격책과 삼포개항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혼란기인 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하고 한반도를 침범함에 따라 동북아 질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며, 조선과 명나라는 상당한 국력을 소비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발생했으며,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당시 조선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수량이 많지는 않으면서 내용면에서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 사신의 사행길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선통신사 그림 등과 임진왜란때 사용된 화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외교류
조선은 명明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명, 일본, 여진, 유구 등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명과는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하며 왕권과 국가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병자호란(1636) 이후 조선은 청淸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으나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청이 중국문화의 계승자로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조선에서도 점차 청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대일정책은 대마도정벌(1419)과 같은 강경책과 삼포개항(1426)과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 일본의 요구와 더불어 명.청이 교체되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후기 조일관계는 일본이 60여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고 조선이 12차례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이 교류한 나라들
조선과 명나라는 건국 초 여진 문제와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명으로부터 형식적인 책봉冊封을 받고 조공무역을 하는 형태로 관계가 정착되었다. 명으로 파견된 사신이나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는 대부분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임명되어, 명의 지식인들과 문화.학술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주변국인 여진과 유구琉球 등과는 교린정책을 기본으로 교류하였는데, 여진에게는 세종 대 4군6진을 개척하며 강경책을 유지했으나, 중종 대 이후로는 직접적인 통교가 단절되었고 중국 북경에서 표류민의 송환 등이 간접적으로 처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나라로 가는 바닷길, 항해조천도, 인조2년(1624), 복제품, 명.청교체기 어려웠던 중국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뱃길을 이용한 사신왕래는 처음 있는 것이라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나라로 가는 바닷길, 발해조천도. 

OLYMPUS DIGITAL CAMERA명나라로 가는 바닷길(朝天圖, 조선 18세기)

인조2년(1624) 인조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 일행이 바닷길을 통해 다녀온 행로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끝부분에는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참고하도록 만들었다는 이덕형의 글이 있다.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바닷길을 통한 대명교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기록한 글, 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 선조33년,

선조31년(1598)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사신 양호, 만세덕 등을 맞이하는 일을 담당했던 영접도감迎接都監의 관리들이 함께 근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임의 계첩契帖이다. 그림에 나오는 장면은 1598년 만세덕 일행을 압록강 강가에서 맞이하는 모습으로 여겨진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나라 사신이 조선이 행사 풍속을 그린 그림, 아극돈봉사도.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본 조선의 모습을 그린 화첩이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조선의 이미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조1년(1725)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4차례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및 풍속, 풍경을 그린 화첩이다. 화공 정여가 주로 맡아 그렸으며 조선 화원도 일부 참여하였다. 매폭에 동유집에 수록되었던 28수의 시를 옮겨 놓았다. 조선 후기의 역사, 문화, 민속 연구에 중요한 시각자료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조선 간의 문화 교류 및 정치 외교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쪽나라 유구국 지도, 유구국도.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 제도에 있었던 나라로 당시의 오키나와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민간에서 유행한 <여지도>에 실려 있는 유구국 지도이다.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로 중종 대까지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7세기 이후 직접적인 교류는 쇠퇴하였다. 지도의 상.하단에는 이수광고 허봉이 유구에 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중국 사행을 통해 유구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쪽나라 유구국의 지도(琉球國圖, 조선)

천하도 등의 여러 지도가 실려 있는 지도첩에 수록된 유구국의 지도이다.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로 중종대까지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7세기 이후 직접적인 교류는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선조25년(1592)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에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조선군이 밀렸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와 각 지방 사림의 의병 활동으로 욀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이순신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전황을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3대 승리로는 이순신의 한산대첩(1592), 권율의 행주대첩(1593), 김시민의 진주대첩(1592~1593)을 꼽을 수 있다. 국제전으로 진행된 임진왜란은 1598년 일본이 물러나며 끝났지만, 조선.일본.명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진왜란 해전을 그린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일기, 이충무공 난중일기, 복제본

임진왜란 (1592~1596) 때에 이순신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현충사에 7권이 남아 있다. 이 일기는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수군 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전황 및 당시 군사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가칙 높다. 전시된 책은 <난중일기> 초본을 1969년에 축소 영인한 것이다.

<난중일기> 중에서,임진년 6월5일
아침에 출발하여 고성 당황포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크가가 판옥선 같았는데, 배 위에 누각이 높았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 있었다. 중간 배가 12척이고 작은 배가 20척이었다. 한꺼번에 쳐서 깨트리려고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왜장 7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마지 왜병들은 육지로 내려가 달아났지만,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증서,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선조38년(1605),

임진왜란 중에 공을 세운 인물을 선무공신이라고 하며 원종공신은 정식 공신은 아니지만 공로가 있는 인물을 말한다. 선무원종공신은 9,000명이 넘기 때문에 공신임을 인정하는 증서인 녹권을 활자로 인쇄하여 책자 형태로 발행하였다. 책머리에 국왕의 전교를 받들어 하달한 전지傳旨가 있고 이어 공신을 삼등급으로 나눠 유공자의 성명, 관직, 공적 사항 등을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류성룡의 갑옷 (보물460호)

OLYMPUS DIGITAL CAMERA류성룡의 투구 (보물460호)

류성룡은 임지왜란 때 재상으로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던 문신 겸 학자이다. 류성룡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을 관군으로 편입하여 조선군의 전투력을 높였다. 류성룡의 종가에는 그가 직접 사용하던 유물이 전해지는데. 이 갑옷고 투구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진산성 출토 화포, 현자총통, 조선,

임진왜란 당시 임진산성(경기도 용인)에서 셀제 사용하였던 화포이다. 임진산성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 화포는 죽절형으로 현자총통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총통, 선조12년(1579),

조선시대에 사용한 휴대용 청동 화기이다. 손잡이에 총이름, 제작연도와 제작자의 이름을 새겼다. 김지가 개발하였으며, 규가라는 기술자가 만들었다. 이 총은 총 구멍에 화약과 실탄을 넣고, 불씨를 손으로 붙여 쏘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일본에 간 통신사
임진왜란 후 조선은 선조40년(1670) 포로의 송환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광해군 1년(1609)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불안정한 대청관계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화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의 바쿠후는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는 것을 장군의 권위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조선후기 통신사는 유학.문학.의학.미술 등 조선과 일본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통로이자 외교사행外交使行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에도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 복제품, 인조14년(1636), 에도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 통신사입강호성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은 여러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도의 집권세력인 막부는 통신사접대에 많은 비용을 소모하게 하여 지방 다이묘(대명)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통신사를 활용하였다. 구한말에 일본에서 집권세력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은 주로 통신사 접대를 많이 했던 큐슈지역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조선통신사에 대해서 반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신사 일행이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사행의 목적은 일본의 태평함을 축하한다는 명분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사는 임광, 부사는 김세렴으로 총 인원은 475명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쓰시마(對馬島)

OLYMPUS DIGITAL CAMERA가미노세키(上關),

OLYMPUS DIGITAL CAMERA오사카(大阪),

OLYMPUS DIGITAL CAMERA에도(江戶),

통신사는 한양에서 부산으로 내려가 쓰시마로 건너간다. 여기서부터 대마도의 영주가 통신사와 동행하는데, 이키.아이노시마.아카마가세기.가미노세키.카마가리.우시마도.무로쓰.효고를 거쳐 오사카에 이른다. 오사카의 요도가와 항구에 상륙한 조선통신사는 에도까지 말 1,000필을 포함한 2,000여 명의 대행렬을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약 2주일 간은 육로여행이었다. 다음으로 하코네.오가키.나야.오카자키.시즈오키.오다와라.시나가와 등을 지나 에도에 이르렀다. <출처:중앙박물관>

병자호란, 그 후
북방에서 성장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명을 압박하는 한편, 인조14년(1636)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후 척화론자의 대표로서 청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삼학사三學士’라 하여 조선후기 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세기 호란 이후 공감을 얻은 북벌론은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조선이 계승하였다는 자존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내실을 다져나가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이후 청이 중국문화의 계승자로서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조선에서도 점차 청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효종 임금이 심양에서 장모에서 쓴 편지, 17세기,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이다. 봉림대군은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인조15년(1637) 형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8년 동안 머물렀다. 이 편지엔느 청나라의 출병 요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끌려간 김상헌을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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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저항한 윤집의 초상화, 조선후기, 복제품, 병자호란 때 저항한 윤집의 초상화. 병조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한 삼학사 중 한명으로, 홍익한.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서 순절한 윤집의 초상화이다.

윤집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한 삼학사 중 한 명으로, 병자호린아 끝난후 홍익한, 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병자호란 때 순절한 세 학사의 전기, 삼학사전三學士傳, 현종12년(1671),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세 학사의 전기, 삼학사전. 송시열이 쓴 글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로, 이들은 조선후기 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