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특별전, 대고려] 고려의 수도 개경

개성은 신라 때 송악군(松岳郡)으로 불렸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즉위 이듬해 (919년) 도읍을 개성으로 옮기고 개주(開州)라 불렀으며 광종 때(960년) 개경(開京)으로, 성종 때(995년) 개성부(開城府)가 되었다. 개성에는 강감찬이 1029년 완성한 도성인 나성(羅城)을 비롯하여 궁성인 반월성, 궁궐터인 만월대, 흥국사지를 비롯한 절터, 사직단, 성균관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전성기 개경에는 10만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많은 외국상인들이 벽란도를 통해 개성을 드나들었다. 서구에 알려진 코리아라는 국가명칭은 당시 고려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이를 환영하다. 국제무역 벽란도(碧瀾渡)
다양한 물산과 사람이 드나들었던 고려의 관문, 벽란도에 도착했습니다.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수도 개경 으로 들어가기 위한 외항입니다. 개경과 가깝고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쉬워,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코리아Corea 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을 만큼 벽란도에는 많은 외국인이 방문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주머니 모양 주자, 중국 9 ~10세기(월주요 추정), 개성부근 출토>

가죽 물통은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이동하는 북방민족이 사용하던 생활 용기이다. 이 주자는 유목생활을 한 거란족이 썼던 가죽 용기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류를 담을 때 사용하였다. 「고려사」에 요.금같은 북방민족과의 도자 교류 기록은 거의 없지만, 고려시대 무덤 부장품을 통해 국제교류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황비창천(煌丕昌天)」이 쓰인 거울, 고려, 개성부근, 청동

파도가 출렁이는 먼 바다로 배 한척이 나아가고 있다. 배 안에 표현된 인물은 새로운 세계로 거침없이 향하던 고려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바다는 다양한 물건이 오가는 교류의 길이지만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청동 거울을 바다에 던져 넣거나 거울을 사용해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을 의미하는 글씨 황비창천(煌丕昌天)이 거울에 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유리 주자(Glass Ewer), 개성부근 출토, 유리>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는 낯선 용모의 외국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고려사>에는 현종대인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만 약 100명의 대식국(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이 방문했다고 한다. <쌍화점(雙花店)>을 비롯한 고려 가요에 회회(回回)아비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으며, 귀화한 무슬림이 고위 관직을 역임한 기록도 전한다.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이 주자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형태는 이슬람교의 예배의식에서 성수(聖水)를 남는 병과도 유사하다. 고려 무덤에 부장된 수입품으로 개경의 일상공간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고려의 중국어 교재 <노걸대(老乞大)>, 고려 16세기 인쇄, 종이에 인쇄>

고려 후기부터 역관(譯官)들이 사용한 중국어 학습 교재다. 고려 상인 3명이 인삼 같은 고려의 특산물을 팔러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갔다가, 원나라 물건을 사서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았다. 음식 주문이나 시장에서 흥정하는 법처럼 여행과 상업 활동에서 실제 겪을 만한 일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노결대>는 조선시대 16세기에 다시 찍은 판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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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화한 유지성의 묘지명, 고려, 돌>

중국 송 양주(揚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972~1039년)의 묘지명이다. 죽은지 8년 뒤에 다시 장사 지내면서 만든 이 묘지명에는 장사랑, 조의태부 등의 관직명만 나열되어 있고 귀화한 시기나 동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물류가 국력이다.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그 나라가 가진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려 종이.청자 나전칠기.인삼까지 당시 기록에 남아 있는 고려산 물건의 우수성은 중세 동아시아에서 고려가 점유했던 문화적 위치와 경쟁력을 알려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우리나라의 영문 명칭인  ”는 ‘고려’에서 유래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자국 언어로 고려를 불렀으며 점차 ‘코리아’ 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코리아라는 명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몽골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윈(元)대에는 마르코폴로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중국을 많이 방문했으며 이들을 통해 고려가 서구에 많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더들리의 해도첩 <바다의 신비>에 실린 한반도, 이탈리아 1646 ~ 1647년, 종이.가죽,>

옛 유럽 지도에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이름은 ‘고려’의 국호에서 비롯되었다. 영국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더들리(Rovert Dudley, 1574 ~ 1649)는 최초로 메르카토르 투영법을 써서 해도첩을 만들었으며, 한국을 반도로 표시했다. 한반도는 ‘코라이왕국(Regno di Corai)’라고 적었고 동해는 ‘코라이해’라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마르티니의 <신중국지도첩>에 실린 한반도, 네덜란드, 1655년, 동판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년)는 1643년부터 1650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했다. 마르티니가 만든 이 지도에는 한국이 반도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COREA’라는 지명도 기재되어 있다. 나라 이름 외에 ‘Pinggan(평안)’과 같은 행정구역이 중국어 발음으로 표시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타타르와 중국전도’ 속의 한반도, 프랑스 1732년, 동판화>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1697~1782년)이 만든 동아시아 지도이다. 당빌은청제국의 지도첩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바탕으로 한 중국 지도와 <조선도>에 일본 지도를 첨가해 이 지도를 만들었다. 동해안의 여백에 한반도 지역 명칭 여러 개를 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고려국’을 나타내는 ‘KAO Li KOUE’이다. 또한 고려엣 유래한 코리아를 써서 ‘ROYAUME DE COREE’로 표기하기도 했고, 제작 당시의 국가 명칭인 조선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어 ‘TCHA-SEN’이라는 명칭도 기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9년)

고려, 코리아
오늘날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코리아Korea’라는 영문 명칭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 했습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각자 자기 나라 언어에 맞추어 고려를 불렀고, 시간이 지나 고려는 ‘코리아’ 라는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해동의 천자국, 대고려(大高麗)
고려는 <고려사>나 금석문의 기록, 황실의 제도와 문서 양식, 관제, 팔관회와 같은 제천 의례에서 보듯 고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녔으며, 스스로 황제국가라 칭했습니다.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고, 황제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천자(天子)’를 자칭했습니다. 고려 숙종(肅宗)의 딸’ 복녕궁주(福寧宮主) 묘지명에서도 ‘천자의 딸’이라고 칭하는 등 강한 자주의식이 드러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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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궁주 왕씨 묘지명, 고려 1133년, 돌>

고려 숙종(재외 1095~1105년)의 넷째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인 복녕궁주 왕씨(1096~1133년)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天子之女)’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대 외교의 형식 속에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삼국을 계승하고
정사(正史)는 국가가 관여하여 만든 정식 역사서로, 당시 지배층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려줍니다. 고려는 고구려·백제·신라와 고려 통일의 역사를 정리하고, ‘삼국’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삼국 계승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김부식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1145년(인종 23) 김부식 (1075~1161) 등이 고려 인종 (仁宗, 재위 1122~1146년)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군주의 정치 관련 기사인 본기(本紀),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列傳), 통치제도나 문물 등을 분류한 지(志)와 연표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방식이다.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삼국의 정치 · 역사 · 경제 인물 등을 정리했다. 김부식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현종(재위 1010~1031) 이후 고려의 왕이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여 고려 건국 초기 지배층이 가졌던 고구려 계승 의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신화를 되살리고
『삼국사기』가 전통적인 역사편찬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삼국유사』는 보다 자유로운 체재로 우리에게 뿌리가 된 나라와 왕들을 기록했습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신화가 또다른 역사로 수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유사’, 고려 1281년, 14세기 인쇄, 종이에 목판 보물 419-3호, 부산 범어사>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아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 1206~1289년)이 당시 전해오던 전설과 신화, 풍속, 종교 등 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사건과 기록을 폭넓게 담아냈다. 이 책에는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신화, 부여, 삼한, 가야, 후백제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며, 고승들의 행적이나 효를 향한 사람들, 신이(神異)한 불교 전승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록했다. 단군에 대해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마침내 ‘우리’가 되다.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힘을 한데 뭉쳐서 고난을 극복 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격동하던 중세 동북 아시아에서 고려는 주변국의 침입을 막아내며 외부와 구별 되는 고려의 위치, 고려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승휴(李承休)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후삼국과 발해까지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며 중국과 구별되는 고려의 독자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승휴가 쓴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1287년, 이후 인쇄, 종이에 인쇄, 보물 1091-1호)>

고려 후기의 문신 이승휴(1224 ~ 1300년)가 1287년에 저술하였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쓴 시를 모은 형식으로, 상.하 2권으로 엮었다.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를, 하권에는 단군 시기부터 충렬왕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와 오언고시를 수록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구분한 체제는 고려의 전통과 역사적 유구함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인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발해를 고려 역사의 일부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폭이 넓어진 면 역시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는 해상세력 출신이 세운 나라답게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송악산 남쪽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13세기 전반 개경에는 10만 가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1가구당 구성원이 5명이라고 쳐도 50만명이어서,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1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도시 규모와 번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경은 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송(宋).거란(遼).여진(金)과의 외교관계에 따른 공무역으로 다양한 물산이 유통되었고, 동.서 여진과 탐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국가행사인 팔관회에도 참여하여 고려황제의 장수를 빌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강변의 벽란도에는 조운선, 장삿배 등 끊임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만 현종대(1010 ~ 1031년)부터 13세기 말 충렬왕 때까지 260여 년간 120여 회에 걸쳐 약 5천명의 송나라 상인이 다녀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물품은 비단과 자기, 약재, 악기, 서화 차 등 고급 생활용품과 서적, 미술품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송 상인이 교역하던 동남아시아, 인도, 서아시아의 물건도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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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전도(開城全圖), 조선 1872년, 종이에 먹과 색>

개경을 그린 고려시대의 지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한 여러 개성 지도에 고려시대 개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도에는 개경을 둘러싼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송악산과 그 아래 고려의 황궁 터인 만월대(滿月禮),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등이 표시되어 있다. 중요 항구였던 벽란도도 예성강가에 표시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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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도성 요약>

 

고려의 건국과 희랑대사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왕으로, 고려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시대 (901~936)에 수세에 몰린 왕건을 도왔으며,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담은 희랑대사상에서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집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왕의 스승인 희랑대사는 고려 오백 년을 지속하게 한 힘을 상징합니다. 국가 수호의 중심이 되었던 ‘왕권’과 국가 운영의 ‘정신적 기반’을 상징하는 두사람의 조각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의 천백 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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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희랑대사좌상,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국보 333호, 해인사>

희랑대사의 얼굴과 신체, 체격을 그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조각으로 10세기 중반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한 고승 초상 조각입니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입적한 고승에 대한 추모와 숭앙의 의미로 고승의 상을 활발히 제작한 데 반해 우리나라에는 유래가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앞면은 건칠, 뒷면 일부는 목조로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재료를 혼용하는 일은 이례적입니다. 18세기의 기록에서 이 상의 알굴과 손이 까맣다고 묘사한 것을 보면 지금의 채색은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에 보수하면서 입혀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희랑대사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 피를 보시함으로써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해인사에 전해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중앙박물관에서는 2018년 겨울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는 10 ~ 14세기까지 존재했던 고려시대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는 내용이다. 전시는 고려의 수도 개경, 불교문화, 차문화, 공예미술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중요 유물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특별전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태조 왕건은 분열된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세웠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개경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려(918~1392)는 주변에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격변의 시기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전시의 이야기는 고려 수도 개경에서 출발합니다. 밖으로 열려 있던 사회, 상업이 중시되고 물류가 국력이었던 시기, 왕실의 권위와 최고의 미를 상징하는 다채롭고 화려한 미술이 펼쳐집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찰의 미술입니다. 1100년의 지혜가 담긴, 신비한 마법과 같은 세계를 느리게 걸으며 고려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 미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의 세 번째 공간은 차 향기 가득한 다점(茶店)입니다. 차는 국가와 왕실, 사찰의 각종 의례와 고려인의 삶 속에 함께 했던 문화로, 다점에서 고려의 지식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의 네 번째 이야기는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으로, 예술성의 정점을 이룬 공예 미술의 아름다움을 준비했습니다. 고려로부터의 선물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긴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천백 년 전 그 어느 날처럼, 2018년 고려와의 결정적인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