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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선실5] 대한제국과 근대

중앙박물관 조선실의 제일 마지막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정치.사회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2012년 특별전과 비슷한 형태로 구한말 변혁기에 서양문화와의 접촉과 서양의 영향을 받은 대한제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세기말 서양열강세력들의 대리전이자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여준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는데,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정비된 서구식 교육제도, 의료, 교통, 통신 등의 모습들과 서양인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19세기말 급격히 발전하는 서구문화를 따라 잡고자 하는 노력과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일제에 강점당하는 조선사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전시내용으로는 대한제국의 교육에 사용된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새롭게 도입된 사진기, 전화기 등 기기들과 선교사들과 함께온 서양 의료진의 유물들, 서양에 비쳐진 조선의 모습 등이 있다.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 그가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중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웠던 척화비가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대한제국의 성립과 근대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중국 정세를 당시 집권층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유물들과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와 무능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후대에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다

개항 – 척사와 개화
고종 13년(1876)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이에 반대하는 척사파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고, 고종 31년(1894)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한편 갑오개혁(1894)에 이르러서는 신분제를 법률적으로 폐지하는 등 기존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바꾸어 나갔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에게 길이길이 경계하노라. – 병인년(고종3, 1866)에 만들고 신미년(고종8,1871)에 세운다.

척화비斥和碑, 고종8년(1871),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내용의 비석, 척화비. 이 비석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며, 쇄국정책은 후대 사람들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고, 멸망하게 된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아편전쟁 이후 피폐된 중국 청나라의 정세를 듣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수 있는 여러 정책 중 하나라고 보여지며 이를 폄훼하는 것은 바림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로 인한 국가재정과 경제력의 피폐가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안으로 세도 정치이 폐해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하였다. 어린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워졌던 것으로 임오군란(1882)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항을 반대한 학자 이항로의 글을 모은책.

이항로 선생 본인은 청렴하게 살았고 그의 주장은 그리 나빠보이는 않지만, 당시 기득권세력들이 이를 이용한 측면이 많아 보인다.

서양세력을 배격한 대표적인 유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시문집이다. 고종 3년 (1866) 동부승지 등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에서 이항로는 서양세력과 화의를 하면 짐승과 같은 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라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도 병영에서 사용한 화승총.

19세기말이면 세계적으로 기관총이 널리 사용되었던 시기인데, 이런 총으로 외세에 저항한다는 것을 말이 그렇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한제국 때 강화도 병영에 보관되었던 화승총이다. 나무로 만든 총신에 ‘신축년에 강화의 무기고를 고쳐 격납했다.’는 내용의 붓글씨가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이 총이 1900년대 강화도의 대한제국 진위 제1연대에서 보관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동학농민전쟁 참가자들의 연명서, 사발통문.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도부의 목숨을 건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사발통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돌려 적은 통문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고부성을 함락하여 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악독한 관리를 없애고 전주감영을 함락시킨 뒤,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어진, 전 채용신 필 고종어진.

이전의 어진에 비해서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온 이후에 그린 것이라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평상복인 황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원래 왕의 평상복은 붉은색 곤룡포와 익선관이었는데,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이 그림과 같이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화를 향한 노력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도 서양 세력의 개방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13년(1876) 조선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1894)이 일어났다. 광무 원년(1897)에 조선의 자주권을 유지하고 근대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당하자, 한국인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신문과 같은 근대적 출판물이 간행되고, 학교.의원이 세워지고, 철도와 전신이 설립되는 등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생겨났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獨立新聞, 대한제국, 광무3년(1899) 5월16일,

1896년 4월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근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를 강조하여 국민 계몽의 역할을 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총4면에 격일간지로ㅓ 발행되었다가 판형이 두 배로 확대되고 일간지로 발행되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된 뒤에는 기관지의 역할도 하다가 1899년 12월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신 유학 관료들이 주도하여 만든 신문, 황성신문

광무 2년(1898) 9월 5일 남궁억 등 개신 유학 관료들이 <황성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광무 9녀 (1905) 11월 20일에 실린 장지연의 노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하다. 1901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다가 같은 해 9월 14일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걸었던 현판

궁내부는 왕실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고종 31년 (1894) 갑오개혁 때 만들어졌다. 갑오개혁기에 왕실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와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의정부가 분리되는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으로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구분하는 등 근대적인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호적

건양 2년(1897) 충청남도 홍산군 남면 마동리 제6통 제3호에 거주한 농민 박준달의 호적이다. 이 호적에는 박준달, 부인 문씨 그리고 아들과 달 등 4인 가족이 기재되어 있다. 개별 가호에서 가족 사항을 적어 관청에 신고하는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달리, 관청에 의해 정해진 양식에 따라 가족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교육과 의식의 성장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교육제도가 마련되었다. 1895년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교육에 있다’는 내용의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가 발표되고, 같은 해 학부學部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소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세우고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정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당시 교과서들은 일본에서 편집한 서양 교과서를 다시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학부 주관 아래 국어독본, 역사, 지리 등 여러 종류의 교과용 도서를 발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 문법책, 국문정리.

한글 문법을 최초로 정리한 연구서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크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897년 이봉운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문법 연구서이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글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격상되었으나 제대로 된 연구서와 전문가가 없었다. 이 책은 독립신문에 실렸던 서재필과 지석영의 논설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한글만으로 글을 짓고 띄어 쓰기를 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계지리 교과서, 소학만국지지小學萬國地誌,

세계지리에 대하여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소학교용으로 국문과 한문을 섞어 기술하였고, 대륙별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총론에서 지리학의 정의, 지구, 대륙, 반도, 산지, 대양, 육지와 해양의 면적, 세계의 인구, 정부의 체제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중등 산수 교과서, 산술신서算術新書, 이상설 편집, 대한제국, 광무4년(1900),

일본인 편찬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하여 편집한 사범학교 및 중학교용 산수 교과서이다. 세로쓰기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계산과정 등은 가로쓰기를 하였다. 수학에 대한 총론 및 정수.소수.분수 계산법 등을 서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전 형식의 국어 교과서, 언문言文, 지석영, 대한제국, 융희3년(1909),

사전형식의 단어집 체제로 된 국어 교과서로 19,000개의 한자어에 독음을 표시하여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다. 한자의 뜻을 국문으로 풀이하여 국어만 알면 한자의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한자음의 높고 낮음을 권점으로 표시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물리학교과서, 물리학초보物理學初步, 안일영 편집, 대한제국, 융희3년(1909),

물리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총8편으로 나누어 한글과 한문을 섞어 설명한 교과서이다. 실험하는 모습이나 물리적 현상들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이해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36개 나라의 국기가 있는 세계지도, 세계전도

세계를 2개의 반구로 나누어 그린 세계지도로 광무 4년(1900)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중간한 것이다. 동반구와 서반구도가 상하로 붙여 장황되어 있으나, 원래는 좌우로 배치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반구 위에 ‘조선’ 등 18개국, 서반구 위에 ‘애급’ 등 18개국, 총 36개 국가의 국기를 원색으로 수록하고 각국의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함꼐 표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 의학의 도입
본격적인 서양 의학의 도입은 의료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의 개설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이 탄생하였다. 제중원에는 의학당이 만들어져 근대식 의학교육이 이루어지고, 1894년 병원의 운영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한편 대하제국은 1899년 무상의학교육을 내용으로 한 ‘의학교관제醫學校官制’를 공포하며 점차 근대적 공공의료의 체계를 잡아갔다. <출처:중앙박물관>

해부학교과서解剖學敎科書, 에비슨 편집, 대한제국, 융희3년(1909), 에비슨

O.R.Avison(1860~1956)이 편집한 해부학 교과서이다. 제중원 의료책임자로 임명된 에비슨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의학교재의 필요성을 느껴서 의학생들과 함께 서양 의학 교과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대부분의 의학교과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알렌이 사용했던 약절구, 19세기 후반, 에비슨의 수술 사진, 대한제국, 광무8년(1904), 등록문화재,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찍은 유리건판이다. 에비슨은 1893년11월부터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우리나라에 근대 서양 의학을 보급하는데 공헌하였다. 박서양은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알렌의 진단서, 미국 1885년, 등록문화재,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 H.N.Alllen (1858~1932)이 1885년 9월13일자로 작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의학 진단서이다. 이 진단서는 인천해관 직원이었다. 웰쉬 C.AWelsh에게 발부한 것으로 2주간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인천해관문서仁川海關文書』에 첨부되어 있던 문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미세한 것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기구, 현미경顯微鏡, 미국 1900년대,

사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확대하여 관찰할 수 있게 만든 기구이다. 당시 현미경은 자체 조명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앞에 전구를 켜 놓고 빛을 반사경으로 시료에 비추어 관찰하였다. 현미경은 19세기 서양문물과 함께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소리의 이동, 전화기,
1876년 벨A.G.Bell이 발명한 전화기는 음성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전달하는 기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유학생 상운이 처음으로 전화기를 중국에서 들여왔고, 1898년 궁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최초로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1902년 3월 한성과 인천 사이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고, 6월 한성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스웨덴 에릭슨사에서 만든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석식 전화기는 상대를 호출할 때 자석 발전기를 돌려야 하고 또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통화 전류를 공급할 전지를 구비하여야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자석.자동 겸용 전화기, 스웨덴, 1890년대

근대 우편 업무의 시작, 우표 발행
근대 우편제도는 1884년 우정총국이 창설되면서 시작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과 우편제도가 중지되었다. 1895년에 이르러 우편제도가 재정비되어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 우체사가 설치되었으며, 중앙은 통신원이 생겼다.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정식 가입하여 외국과의 우편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우표는 우정총국의 개국과 함께 발행된 5종의 문위우표이다. 실제 발행된 우표는 5문과 10문이 두 종류였다. 당시 통용화폐단위가 ‘문文’이었기 때문에 문위우표라고 하며 우표라는 용어 대신 ‘우초’라고 표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우표와 우편엽서, 19세기말~20세기초,

1895년7월22일 발행된 태극 보통우표4종, 1903년 10월1일 발행된 독수리 보통우표 3종과 1900년 1월부터 1901년 5월 사이에 발행된 이화 보통우편 등 총14종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우표 가운데 검은색으로 ‘일전’, ‘삼전’이라고 첨부해 놓은 우표는 그 금액에 해당되는 우표가 없어 다른 우표 위에 그 금액을 찍어서 사용한 것으로 주로 1901~1903년에 첨쇄하여 사용한 우표이다. 모두 소인이 찍힌 실제 사용한 우표를 모은 것이다. 왼쪽에는 광무5년(1901) 전환국에서 발행한 우체왕복엽서가 부착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우편엽서는 1900년 5월10일에 최초로 발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기 발급된 전보, 1902년,

대한제국전보사에서 취급한 전보이다. 수신자는 부산 밀양진읍 박태영 댁의 ‘진영’이라고 되어 있다. ‘위참셔관’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전보지와 봉투가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봉투에 찍힌 소인을 통해 광무6년(1902) 6월14일에 보내진 전보임을 알 수 있다.

우표 수집가의 우표와 메모, 대한제국기, 1900년대,

대한제국기 발행된 우표를 부착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메모록이다. 1884년 발행된 문위우표, 1900년의 이화 보통우편, 1903년의 독수리 보통우표 등 총25종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1884년 우정총국이 신설되면서부터 1905년 일본에 통신권이 강탈당하는 시기까지의 우표 발행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 메모에 의하면 우편제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 사람들이 우편배달부란 명칭을 알지 못하여 ‘소식을 전하며 걸어 다닌다’는 의미로 ‘보장군報將軍’, ‘보장군步將軍’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입체사진을 볼 수 있는 장치와 입체사진, 1920년대,

입체사진기로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를 입체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입체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좌우 두 눈의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일반적으로 대상의 거리에 따라 좌우로 조금씩 밀리기 때문이다. 1850~1920년 사이에 수백만 장의 입체사진이 생산되었고, 다양한 입체사진기와 입체경이 발매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0~1920년대 사이에 서양인이 찍은 당시 풍경 및 풍속을 담은 입체 사진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그림엽서, 1897~1910년,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된 그림엽서이다. 이 당시에 발행된 그림엽서들은 주로 서양과 일본 등에서 발행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발행된 것 가운데에는 한일병합이 전조를 알리는 내용의 것들이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관리의 복식, 풍물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고 점차적으로 풍경, 명승고적 등을 그림과 사진으로 담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나팔형 축음기,

소리의 기록과 재생, 영국 1900년대, 원판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모양의 혼horn이 소리를 크게 해주는 축음기이다. 1877년 에디슨이 ‘틴포일 Tin Foil’이라는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 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초반에는 유성기 등으로 불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축음기로 통칭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기록
19세기 후반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이래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다녀갔고, 그들은 조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들 중에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부분도 있지만, 조선의 정치.문화.지리.생활풍습.종교 등 서양인의 시각에 비친 조선의 이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용한 아침이 나라에 등장한 자동차, 더 그래픽, 영국, 1909년,

서울에 등장한 자동차 소식을 실은 영국 잡지 ‘더 그래픽’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남대문 앞에 등장한 자동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이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이 기사를 통해 1909년 이전에 자동차가 서울 거리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자동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을 통해 자동차 등의 서양문물이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환기의 조선, 미국 1909년,

캐나다인 제임스 게일이 선교사로 1888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게일은 이 책에서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한글의 우수함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 번역에도 착수하였고, 직접 한영사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성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 여성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15년간 한국에서의 인연과 생활, 미국 1904년, 릴이아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의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인 그녀는 이 책에서 조선의 첫인상부터 직접 목격한 궁중생활과 궁중의 숨은 이야기, 관서.관북지방 여행, 한국 초대 교회의 어려움 등을 기술하였다. 명성황후의 전용 의사가 되면서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이를 기록하였다. 한국과 이웃나라들, 영국 1897년,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이후 현장답사와 자료 수집 및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비쇼은 이 책에서 부패한 관료, 가난, 여성의 삶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프랑스에서 발행된 춘향전, 프랑스, 1892년,

고전소설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각색하여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 소설가 로니는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하였다. 감미롭게 묘사된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아시아 문학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책의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로니의 번역본은 1999년 프랑스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프랑스 태생의 작가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성모 마라아상을 우리나라의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작품 제목 ‘보물’은 어머니에게 아이는 보물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폴 자쿨레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새로운 구도와 색채로 다색 판화에 담았다. 어머니가 머물던 서울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담아 한국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성립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날 ‘대한大韓’이란 국호를 반포하며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국의 위상에 맞도록 의례를 재정비하였다. 황제의 인장은 기존의 거북이가 조각된 인장이 아니라 용이 조각된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금책을 내렸다. 또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봉追封하고 미뤄두었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외에도 태조와 고종의 직계4대조를 황제로 추존하는 등 황실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여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종황제 옥보, 광무6년(1902)

명성황후 옥보, 1902년

황태자 책봉 내용을 담은 금책, 광무1년(1897)

대한제국 황제의 인장, 칙령지보

1897년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에 오르면서 만든 국새 가운데 하나로 통신조서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 외교 문서에 사용한 ‘대한국새’, 포상에 사용한 ‘황제어새’, 고급관리의 사령장에 사용한 ‘제고지보’, 군대의 통수에 사용되었던 ‘대원수보’ 등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훈장제도
대한제국의 선포에 이어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문무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고, 관복에 다는 훈장 제도는 1900년 ‘훈장조례’를 반포하면서 시행하였다. 국가의 공훈은 대훈위大勳位와 훈勳, 공功의 세 종류로 구분하였다. 훈장은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과 길상 문양으로 도안되었는데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에는 태극기 문양을 이용하였다. 1883년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정하였다.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상징으로서 각종 공식 문서와 우표,여권,훈장 등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훈공3등 태극중수장, 훈공5등 태극소수장, 훈공7등 태극소수장, 훈공3등 팔괘중수장,

 태극문양의 대한제국 훈장

대한제국의 훈장제도는 광무 4년(1900) ‘훈장조례’를 공포하면서 처음 시행되었다. 원래 금척대수정장, 이화대수정장.태극장.자응장 4종이 있었는데, 이후 팔괘장(1901).서봉장(1907)이 추가되었다. 전시된 훈장은 대한제국 3등 훈장 태극장, 대한제국 3등 훈장 팔괘장, 대한제국 7등 훈장 태극장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태극기가 그려진 대한제국기의 여권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그의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이 여권은 광무 8년(1904) 12월 19일 외교 담당 관청인 외부에서 박기오에게 발행한 여권이다. 왼쪽에는 영어와 불어로, 오른쪽에는 한자로 여권의 내용이 기입되어 있고, 1년간의 유효기간이 명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극기를 활용한 엽서와 상품카드

고종의 외교고문 데니가 소장했던 태극기, 고종 27년(1890) 경, 등록문화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가 1890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태극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팔괘문의 형태는 지금과 같으나 색은 청색이다. 제작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를 매다는 끈이 오른쪽에 남아 있어 태극기의 오른쪽을 국기봉에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미국인 목사 윌리엄아서 노블 부부가 소장했던 태극기

1892년부터 1936년까지 우리나라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노블과 그의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이 소장했던 태극기이다. 이 태극기는 박음질로 천을 덧대어 태극과 사괘 문양을 만들었다.  매티 윌콕스 노블이 쓴 친필. 글씨 내용은 ‘Korea Flag up to Japanese Occupancy(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국국기)’인데, 이는 노블 목사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의 친필이다. 이들 부부는 일제강점기에 이 태극기를 파기하라는 일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보존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양화법의 수용
서양화법은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조선후기 회화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회화에도 투시법과 명압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사실적 회화양식과 대상을 직접 눈앞에 두고 사생하는 기법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휴버트보스 Hubert Vos 같은 서양화가의 내한도 서양화법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화가 안중식과 조석진은 중국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김규진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연마했다. 채용신, 김은호의 초상화에는 서양화와 마찬가지로 빛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산수화 역시 관념 산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제의 경치를 직접 사생하는 풍조가 확산되며 투시원근법의 활용이 두드러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사계절의 풍경, 지운영, 1929년,

조선 말기 및 근대 초기의 문인화가인 백련 지운영의 작품으로 사계절의 자연을 10폭에 나누어 그렸다. 지운영은 개화ㅏ기 사진술 도입에 선구적인 인물로 주목 받아왔으며, 1900년 어진모사작엡에 천거될 만큼 당대의 인정받은 화가였다.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은 1880년대 초반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습하고 강한 필선을 사용하여 사계절의 풍경을 표현한 이 그림은 19세기의 전통을 계승한 남종화품의 산수화이다. 그는 전통과 근대를 연결하는 시점에서 전통적인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근대 화풍을 모색하여 전통 회화의 변화를 주도한 작가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연홍의 초상화, 등록문화재,

채용신이 1914년 그린 최연홍의 초상화이다. 운낭자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기독교의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며 옷주름 묘사에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이 엿보인다. 선에 주로 의존한 전통 초상화와 달리 골이 파인 부분에 엷은 먹을 반복적으로 칠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개성이 결여된 얼굴과 치마 밖으로 살짝 드러난 버선발 표현 등 전통성도 뚜렷하다. 운낭자는 원래 평안남도 가산의 관기官妓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군수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부상당한 군수의 동생을 치료해줬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기적妓籍에서 빼주고, 사후에 그 초상화를 평양 의열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이규상 초상과 기념장
19세기 말 무관을 지낸 이규상의 초상으로, 전통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고종황제 망육순望六旬 기념장과 황태자 가례嘉禮 기념장을 달아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초상화는 19세기말~20세기 초에 큰 변화를 겪는데 이규상 초상에는 기법 면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얼굴 묘사를 보면 왼쪽보다 오른쪽을 밝게 그려 빛의 원리에 입각한 서양의 명암법을 수용했지만, 좌우의 균형을 중시하는 동양초상화의 관례에 따라 명도차를 최소화하였다. 화문석의 문양을 뒤로 갈수록 작게 처리한 것도 서양화의 투시법의 영향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이규상 초상화(20세기초, 복제품)와 사진

대한제국의 기념장
대한제국기에는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념장이 총5회에 걸쳐 발행되었다. 1901년 고종황제 성수聖數 50주년을 맞아 관계자들에게 수여한 것을 시작으로 1902년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장이 발행되고, 1907년에는 황태자의 가례 기념장과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이 발행되었다. 그 후 1909년에는 순종황제의 민정시찰을 기념하기 위한 남서 지역 순행巡幸 기념장 등이 발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딱지본 소설, 1908~1926년, 복제본,

딱지본이란 책의 표지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시장터의 국수가격인 육전 정도로 한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육전소설’이라고도 한다. 190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한 딱지본 소설은 1920년~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딱지본 소설은 파격적인 색상과 민화형식과 서양화 기법을 사용한 일러스트가 결합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청전』,『춘향전』 등과 같은 고전 소설도 있었지만, 서양 세계에 대한 호기심, 자유연애 등 변화하는 도덕관념을 담거나 과학소설, 탐정소설 등 새로운 소재를 다룬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여권, 광무8년(1904),

외국에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그의 신변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이 여권은 1904년 12월19일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한 관청인 외부外部에서 박기오에게 발행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20세기초 광화문 육조거리

종로대로, 동대문대로, 전차

미감리교에서 정동에 개설한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 서울의 조폐국 견습생들, 영어학교 수업시간

바둑을 즐기는 이탈리아 영사 로제티와 그의 통역 양홍묵, 에비슨 부부와 허스트, 박서양 등,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

 구한말 모습이 담긴 사진

대한제국과 근대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종은 광무1년(1897) 10월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광무3년(1899)에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주 선언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지만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일본은 점차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국권을 침탈하기에 이르렀다.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의 문물은 놀라운 속도로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서구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독립신문.황성신문 등이 발행되어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고취하였다.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도 이 때 문을 열었다. 특히 전화기.사진기.축음기 등 과학기기와 철도.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크게 바꿔 놓았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