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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성동동 전랑지(사적)

경북 경주시 성동동 일대에 남아 있는 넓은 건물터 유적인 성동동 전랑지(殿廊址, 사적 88호)이다. 일제강점기 경주 북천 제방공사 중 흙으로 쌓은 토단이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약 2,000평 정도가 발굴되었는데 전당터 6곳, 장랑터 6곳, 문터 2곳, 담장터, 우물터,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기와, 납석으로 만든 그릇 등이 출토되었으나 중요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건물터의 성격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반월성 궁성 정문에서 시작되는 남북 대로(大路)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높은 위상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관청건물이나 귀족의 저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성동동 전랑지(사적)>

통일신라 때 수도 경주를 재현해 놓은 모습을 보면 궁성인 월성을 중심으로 많은 주택들과 사찰, 관청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성동동 전랑지는 남북 대로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주를 재현한 모형(경주박물관)>

<유적지에 남아 있는 큰 건물 초석>

<건물터였음을 보여주는 초석>

<전랑지 동쪽편 건물터>

<2019년 모습>

<2012년 모습>

경주 성동동 전랑지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은 경주 도심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해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하천이자 도심 북쪽 경계가 된다.

<전랑지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

경주 성동동 전랑지(殿廊址), 사적 제88호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이 있던 자리로, 1937년 북천 제방공사 중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조사된 면적은 약 2,000평 으로 건물터 6곳, 긴 복도터 6곳, 문터로 보이는 2곳, 담장으로 보이는 터 3곳, 우물터 1곳, 배수 시설 2곳 등이 조사되었다. 건물터 에는 초석이 남아 있고 문터에는 다듬은 긴 돌이 기단을 이루고 있으며, 배수구는 기와를 세워 만들거나 벽돌을 이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된 유물로는 기와 종류와 곱돌로 만든 그릇 및 뼈항아리 등이 있다. 그 후 1993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대형 건물터와 부속 건물터 5개소, 담장터 2개소가 더 확인되었다. 아울러 소형 금동불을 비롯하여 많은 막새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에 궁궐 또는 관청이나 귀족의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 전랑지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 유적에 대해 명확히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어렵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