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흥덕왕릉(사적), 신라 42대 흥덕왕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신라 42대 흥덕왕의 무덤인 흥덕왕릉(사적)이다. 왕릉은 봉분 지름 20.8m, 높이 9m의 원형봉토분이다. 봉분 주위에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바깥에는 난간석으로 둘러져 있다. 둘레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교 놓고 있다. 무덤 주위 모서리 4곳에는 돌사자를 배치하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1쌍씩 세워져 있다.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주변에서 ‘흥덕’이란 글씨가 새겨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원성왕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구성요소는 원성왕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형인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이찬이 되었으며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즉위 후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당으로부터 차를 들여와 전국적으로 재배하게 하였으며, 복식제도 등을 고쳤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덕왕릉(사적)>

흥덕왕이 즉위하다 ( 826년 10월(음) ) 흥덕왕(興德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수종(秀宗)註 002이었으나 후에 경휘(景徽)로 이름을 바꾸었다. 헌덕왕(憲德王)의 어머니까지 같은 동생이다.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하고 요인이 있어 유배보내다 ( 828년 04월(음) ), 〔3년(828)〕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張氏)이고 일명 보고(保皐)라고도 한다., 당 서주(徐州)註 003로 건너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나중에 귀국하여 왕을 뵈었으며, 부하 10,000명을 거느리고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 ~ 생략 ~

흥덕왕이 죽다 ( 836년 12월(음) ), 〔11년(836)〕 겨울 12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朝廷)은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흥덕왕릉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신라 왕릉 중 가장 먼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의 위치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흥덕’이라 적힌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임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창한 소나무숲이 인상적인 흥덕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흥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마을>

흥덕왕릉 주변은 경주지방에 주로 볼 수 있는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 소나무는 곧게 자란 나무는 없고 각기 제멋대로 꾸불꾸불하게 자라고 있어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창한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소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흥덕왕릉>

흥덕왕릉 경사진 언덕에 봉분을 있고 그 아래에 문인상, 무인상, 화표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당나라의  무덤제도의 영향을 받은 원성왕릉(괘릉)의 형식과 공간배치를 많이 따르고 있다. 원성왕릉과 마찬가지로 무인석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덕왕릉 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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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세워진 화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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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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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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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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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서쪽)>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문,무인석>

봉분은 밑둘레 65m로 신라 왕릉 중에서는 중간정도이다. 봉분에는 둘레석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석이 있으며 4곳의 모서리에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봉분 앞 제단은 탁자모양의 조선왕릉의 석상과는 달리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당나라를 통해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 제단>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둘레석은 바닥에 기단역할을 하는 돌을 깔고 그 위에 넓은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겨 넣었다.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십이지신상 중 쥐(子, 오른쪽), 호랑이(寅),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용(辰, 오른쪽), 뱀(巳, 가운데), 말(午,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양(未, 오른쪽), 원숭이(申, 가운데), 닭(酉,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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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戌, 오른쪽), 돼지(亥,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위 난간석>

OLYMPUS DIGITAL CAMERA<동남쪽 사자상>

OLYMPUS DIGITAL CAMERA<서남쪽 사자상>

OLYMPUS DIGITAL CAMERA<서북쪽 사자상>

무덤 앞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모양 받침돌만 남아 있다. 비석 몸돌이 없고 거북 얼굴도 많이 파손되었지만, 상당히 웅장하게 힘찬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흥덕(興德)’ 이라 적힌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을 흥덕왕임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발>

OLYMPUS DIGITAL CAMERA<거북 등껍질>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놓여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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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새겨진 비석 조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신라 흥덕왕릉(新羅 興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김수종/ 김경휘)을 모신 곳이다. 왕은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두고 장보고 (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茶)씨를 들여와 재배하도록 하였다. 밑둘레 65m, 직경 22.2m, 높이 6.4m 되는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石獅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 (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編)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夫人)과 함께 매장했다.’고 하였다.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 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당시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