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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문왕릉(사적), 신라 31대 신문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년)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삼국 통일 후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처음 조성한 왕릉으로 봉분의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신문왕릉(사적)>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다 ( 681년 07월(음) ), 신문왕(神文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政明)으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慈儀) 또는 〔의(儀)를〕 의(義)라고도 적는다.왕후(王后)이며, 왕비는 김씨(金氏)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에 〔그녀를〕 맞아들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뒤에 아버지〔흠돌〕가 난을 일으킨 데에 연루시켜 궁 밖으로 내쳐졌다[出宮].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내려〕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先王)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신문왕이 죽다 ( 692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신문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문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이 있는 지역은 경주와 울산을 연결해주는 7번국도가 지나 가는 주요 교통로이며, 삼국통일 후 적대관계였던 왜(倭)가 울산을 통해서 가장 빨리 공격해 올 수 있는 경로에 있다. 신문왕릉은 왜를 경계한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을 뒤를 이은 성덕왕, 효소왕을 비롯하여 원성왕, 신무왕 등 통일신라 전성기 왕릉들은 대부분 7번국도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왕릉 출입문>

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으로 통일신라 왕릉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봉본은 규모는 높이 7.6 m, 지름 29.3 m, 밑둘레가 92 m에 이른다. 봉분 밑둘레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5단으로 쌓은 뒤 44개의 사다리꼴모양의 보호석을 설치해 놓고 있다. 삼국 통일 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조성한 왕릉으로 당나라 능묘제도가 본격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둘레석을 제대로 쌓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봉분 앞에 있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

<옆에서 본 상석>

<둘레석>

<뒤에서 본 모습>

신라 신문왕릉(神文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이 능은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김정명)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 92 m, 지름 29 m, 높이 7.6 m 이다.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文武王)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고, 국학(國學)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